한국작가회의

1980년대의 시위는 독재냐, 민주냐에 초점이 있었다. 독재는 적이었고, 민주는 동지였다. 당시의 가치는 언제나 이처럼 양자택일적이었다. 1980년대의 시위는 6월 항쟁을 통해 꽃을 피웠다. 하지만 6월 항쟁의 산물인 6ㆍ29 선언은 양자택일적이지 않았다. 이른바 양 김씨의 선택도 양자택일적이지 않았다. 이들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양자 공존적이었다. 이들 이후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진보 세력과 보수 세력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다. 이번에는 보수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과 함께 하는 세력에 보수라는 말을 붙이기 싫어했다. 그는 보수라는 말보다 실용이라는 말을 더 좋아했다.

지금까지 나는 두 번 서울시청 앞 촛불시위 현장에 나갔다. 처음에는 촛불까지는 들지 않기로 했다. 함께 참여한 최 교수도 나이가 있고 하니 그냥 구경이나 하자고 했다. 그 약속은 사위에 어둠이 몰려오기도 전에 깨졌다.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촛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등산화와 등산조끼 차림이었다. 나는 넥타이를 맨 양복차림이었다. 나와의 인연 때문에 촛불시위에 참여한 정 시인은 짧은 치마와 하이힐 차림이었다. 옆자리의 유모차에 아이들을 싣고 온 주부는 청바지에 민소매셔츠를 입고 있었다. 행진을 할 때 보니 여고생이나 여대생의 옷차림도 마찬가지로 발랄했다.

▲ 지난 7일 촛불문화제를 마친 시민들이 밤 8시30분경 남대문 방향으로 평화행진을 시작했다. 이치열 기자

표정들도 시종일관 밝았다. 지난 시절처럼 비장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죽음을 각오하는 사람도 없었다. 목청껏 외치는 구호와 즐겁게 마주치는 박수소리에는 시위와 축제가 뒤섞여 있었다. 시위이면서 축제인 셈이었다. 저항이면서 놀이인 것이었다. 그랬다. 1987년 6월 항쟁의 저항과 2002년 월드컵의 놀이가 착종되어 있었다.

착종되어 있는 것은 대의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였다. 국회를 중심으로 하는 대의 민주주의는 아직 침묵 중이었다. 국민들의 진전된 정치의식은 국회 중심의 대의 민주주의만을 믿고 있을 수 없는 듯했다. 촛불시위는 광장에서의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국민들의 정치의식과 정치형태가 그만큼 변화되어 있는 것이었다.

무대에서는 청와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돌아온 어린 소녀가 백 명의 전투경찰과 맞장을 뜨고 왔다고 외쳐댔다. 오락영화의 귀재인 모 영화감독도 무대에 나와 오늘의 사태를 즐겁게 얘기했다. 10여명의 앳된 소년들도 무대에 나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라는 노래에 맞춰 신나게 율동을 즐겼다.

▲ 지난 6일 광화문 네거리로 향했던 평화행진 대열이 다시 서울시청앞 광장쪽으로 향하면서 조선일보 사옥이 있는 코리아나호텔 앞을 지나고 있다. 시민들은 '조중동은 폐간하라!' 등의 구호를 힘차게 외치며 행진했다. 이치열 기자

시위대들이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산성을 통해 전경차로 쌓은 명박산성을 넘어 갈 때도 그랬다. 물대포를 맞으며 시위대들이 온수! 온수! 비누! 비누! 외칠 때도 그랬다. 내게는 자꾸만 민속놀이인 고싸움놀이가, 차전놀이가 떠올랐다.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산성과 전경차로 쌓은 명박산성도 고로, 차전으로 보였다. 고구려의 축제인 동맹이 이랬을까, 부여의 축제인 영고가 이랬을까. 눈을 감으면 지난 1960년대 초 정월 대보름이면 불깡통을 돌리며 옆 동네 친구들과 함성을 지르며 놀던 추억이 떠올랐다. 우리 민족의 핏속에 면면히 흘러오던 이들 전통이 비로소 살아난 듯했다.

직접 서울시청 앞에 나가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이번의 촛불시위였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것이 이번 시위이기 때문이다. 이번 촛불시위는 이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뒤섞여 있기도 했다. 이 역시 양가적이라는 현대성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번 시위에 포함되어 있는 저항에는 두 개의 지향점이 들어 있었다.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거부와 민주언론에 대한 옹호가 그것이다. 물론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거부에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거부도 들어 있었다.

이때의 거부는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반정부로, 반미로 이해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걸핏하면 방송사와 신문사로 몰려가는 것이 촛불시위대이다. 스스로 이 나라의 언론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놀라울 뿐이다.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해진 것이 이번의 촛불시위가 갖고 있는 특징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는 국민들의 의식이 우람하게 자라고 있다는 증표이다.

[2008. 6. 25. 미디어오늘. 시인 이은봉]

* 이은봉 : 시인.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1983년 《삶의 문학》 제5집을 통해 평론가로 데뷔. 1984년 ‘창작과비평’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으로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무엇이 너를 키우니』『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길은 당나귀를 타고』『책바위』, 시선집으로 『알뿌리를 키우며』가 있고, 평론집으로 『실사구시의 시학』『시와 리얼리즘』『진실의 시학』『시와 생태적 상상력』 등이 있으며, 연구서 및 시론집으로 『한국현대시와 현실인식』『화두 또는 호기심』 등이 있음. 현재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사)한국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