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이은상 시조의 위상
이숭원(서울여대 교수)

1. 시조부흥운동과 시조 창작

1920년대 중반 한국문학의 주류는 프로문학에 있었고 계급문학의 정론성에 맞서 문학의 비예속성을 주장하는 일군의 문인들은 /'/조선적인 것/'/을 내세우는 민족주의의 구호 아래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그들은 거의 모든 글에서 /'/조선인의 문학/'/, /'/조선의 사상/'/, /'/조선심/'/을 강조하였고 조선인의 심성과 사상이 제대로 표현된 작품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분명 민족주의 문학을 표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민족문학이나 민족주의 문학이란 말도 사용했지만 /'/국민문학/'/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그 용어를 내세운 의도를 정확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추측컨대, /'/조선국민문학/'/이라는 말이 /'/민족문학/'/이라는 말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민족 감정과 사상을 담은 문학이라는 구체적 의미를 담아낸다고 보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라졌지만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조선의 국민으로 남아 있다는 의식이 이 용어의 선택에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문학 쪽에서 그들을 지칭할 때도 /'/국민문학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런 까닭에 프로문학과 대립적인 차원에서 민족주의 문학을 내세운 이 시대의 문인들을 문학사에서는 /'/국민문학파/'/라고 지칭한다.
이 국민문학파가 조선인의 사상 감정을 제대로 표현한 양식의 하나로 천거한 것이 바로 시조였다. 1910년대부터 시조 창작에 손을 댄 최남선과 이광수가 이때부터 더욱 열의를 갖고 시조 창작에 임했으며, 최남선은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조선문단}, 1926. 5)라는 글에서, 염상섭은 [시조에 관하여]({조선일보}, 1926. 10. 6)라는 글에서 시조가 /'/조선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양식임을 역설하였다. 최남선은 시조를 "조선의 風土와 조선인의 性情이 音調를 빌어 그 渦動의 一形相을 구현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문학적 결실로 제출된 것이 최남선의 창작시조집 {백팔번뇌}(동광사, 1926)다.
최남선이 {백팔번뇌}의 서문에서 조선문학의 정화인 시조를 언어유희에서 건져내 "엄숙한 思想의 容器"로 만들겠다고 밝힌 바대로 그의 소신은 이 시조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1부의 작품은 임에 대한 그리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있고, 2부의 작품은 역사적 유물이나 장소를 소재로 삼아 조선산하와 조선심을 예찬한 것이며, 3부의 작품은 그때그때 쓴 생활시조처럼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역시 민족의식과 종교의식이 깔려 있다. 벽초 홍명희가 발문에서 조선에 대한 "사랑의 發作을 단적으로 표백한 서정시"로 이 시조집을 규정한 것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2. 자연발생적 시조 창작

육당 최남선의 뒤를 이어 시조부흥운동에 참여하여 시조를 창작하고 시조에 대한 논설을 발표한 사람이 노산 이은상이다. 그는 {백팔번뇌}가 간행된 지 6년 후 {노산시조집}(한성도서주식회사, 1932)을 간행하였는데, 이 시조집이 시조부흥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시조집은 육당의 시조집과 중요한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시조를 엄숙한 사상의 용기로 만들겠다는 육당 식의 진지한 민족의식이 노산의 시조집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역사 유적을 답사하거나 조국 산하를 순례할 때에도 그것을 육당처럼 조선심의 표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서 벗어나 하나의 자연 풍물로 대하거나 역사적 무상감을 드러내는 선에서 멈춘다. 이것은 육당처럼 민족의식을 드러내겠다는 중압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에서 노산의 시조가 창작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시조집의 서문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小學校를 마칠 때까지도 아버지께서는 홀이 나를 업으시고 黃昏이면 뜰앞 나무 밑을 거니시었습니다. 그리고는 늘 古人의 時調를 읊으시었습니다. (중략)
뒤에 듣자오매 自作도 하셨다건만 不肖子 - 뫼셔 둔 것이 없음은 一生에 잊지 못할 恨事이거니와, 그 님이 가오신 지 어느덧 十年. 그로 말미암아 내가 時調의 길로 들어간 것이 또한 十年. 이제 한 적은 冊子를 만들어 세상에 보내매 당신 생각이 懇切합니다.

그는 자신이 시조를 창작한 동기의 하나로 어릴 때 그의 부친이 늘 옛사람의 시조를 읊으신 일을 들고 있다. 그의 부친 이승규(李承奎)는 일찍이 각성한 기독교인으로 한약방 경영으로 마련한 사재를 털어 창신학교를 설립한 선구적 인물이다. 부친을 흠모하였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릴 때부터 시조를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어른이 되자 자연스럽게 시조를 창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조 창작은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것이지 조선심을 담아내기 위한 의식의 산물이 아니었고 사상의 용기를 만들려는 의도의 소산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의 시조 창작은 어떤 목적의식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습득되고 발양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조에서는 왕조의 몰락과 관련된 역사 유적도 인생의 무상감을 환기하는 데 그치며 금강산의 절경도 민족적 신성성의 표상과는 무관한 관상적 풍광의 하나로 제시된다. /'/松都노래/'/라는 장에 묶인 11편의 시조와 /'/金剛行/'/이라는 장에 묶인 41편의 작품은 대부분 신성성의 탐구와는 무관한 일상적 기행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帝王은 어늬 분고 將相은 누구이니
宮娥玉顔은 어늬 山에 흙이 된고
半千年 지극한 영화 물을 곳이 없세라
[滿月臺] 둘째 수

金剛이 저기로다 구름밖에 저기로다
꿈인지 상해(眞)런지 그림인지 實相인지
알고도 모를 것이야 金剛인가 하노라

바쁜 양 몸은 아직 먼 끝에 있건마는
마음은 언제 벌써 金剛中에 들었구나
萬二千區區層層이 낯익은 듯하여라
[金剛을 바라보며] 전문

만월대는 고려 왕조의 궁궐터이니 왕조의 패망과 관련되어 민족적 비애감을 토로할 만한 소재인데도 역사적 무상감만을 드러낼 뿐 민족의식의 단면은 내비치지 않고 있다. 고려 왕조의 유적지에서, 궁중 나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노산의 의식이 민족 현실에 대한 비애감과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있음을 드러낸다. 육당의 경우 금강산은 /'/조선심의 物的表象/'/이요, /'/조선 정신의 구체적 표상/'/으로 조선인의 생활 문화에서 장구하고 긴밀한 관계를 가지는 성스러운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비해 노산의 금강산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여러 가지 볼거리를 제공하는 기묘한 절경의 하나로 제시된다. 역사 유물 하나에도 민족의 정신 가치를 투영하는 육당의 다음과 같은 시조를 보면 노산의 시각이 육당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자리에 놓여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大新羅 산아이가 님이 되어 계시도다.
이 얼굴 이 맵시요 이 精神에 이 솜씨를
누구서 숨 있는 저를 돌부처라 하느뇨.
[石窟庵에서] 둘째 수

3. 노산 시조의 묘미와 특질

그러면 노산 시조의 원형을 이루는 시적 특질은 무엇인가? 노산 시조 중 많은 작품이 가곡으로 작곡되었거니와 다른 어떤 현대시조 작품보다 그의 시조가 대중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온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시조가 지닌 정형적 율조가 작곡을 용이하게 했다고 볼 수 있고 노래에 담긴 정서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정서란 대부분 그리움과 애상의 정서인데 그러면 그리움과 애상의 정서를 담은 다른 많은 작품을 제쳐놓고 작곡가가 곡을 붙일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노산의 시조가 대중을 끌어당긴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말의 묘미를 살려 시조의 음률에 맞게 시어를 구성하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시조의 내용은 역사 유물에 대한 감상적 회고요 자연 경관에 대한 관상적 영탄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말의 재치는 육당은 물론이요 이병기나 이희승의 시조가 따를 수 없는 경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산에 대해 /'/지사형라기보다는 재사이며 시인/'/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재사인 무애 양주동이 {노산시조선집}(민족문화사, 1958)에 붙인 제사(題詞)에서 "想과 말이 어울리는 <토>"에 노산 시조의 요체가 있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곡으로 작곡되어 널리 애창되는 다음의 시조를 보면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탈 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대 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는 동강은 쓰올 곳이 없느니다

半 타고 꺼질진댄 애제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타고 생　으로 있으시오
탈진댄 재 그것조차 마자 탐이 옳으니다
[사랑] 전문

고어체의 어미와 어휘를 활용한 이 시조가 우리에게 참신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착상의 기발함에 있다. 사랑은 마음을 불태우는 것이니 진실한 사랑은 끝까지 다 타는 것이라고 비유의 축을 설정해 놓고 시상을 전개해 갔다. 탈 테면 끝까지 다 타서 재가 될 것이지 타다가 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다 타지 못할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타지 말고 생나무로 있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결국에는 이왕 탈 바에는 타고 남은 재마저 타는 것이 옳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표현하는 데 의고체의 언어가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만약 현대적 감각의 어휘가 구사되었다면 공감의 수준은 훨씬 떨어졌을 것이다.
"부대 마소"라는 의고적 시어가 환기하는 간절함, "타다가 남는 동강"에서 /'/동강/'/이라는 말이 갖는 /'/아무 데도 쓸 데 없는 무가치한 물건/'/이라는 의미, 그러면서도 "쓰올 곳이 없느니다"고 아어체의 시어를 구사하여 상대방을 끝까지 존중하는 듯한 태도, /'/생　/'/이라는 고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상대방에 대한 모멸감을 완화하려는 배려, 마지막 종장 둘째 구에 "재 그것조차"를 배치하여 최종적 의미의 강화를 꾀한 수법 등, 거의 천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놀라운 우리말 구사 능력이 이 시조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대중적 공감을 얻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탈 대로 다 탄 사랑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재까지 타는 사랑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 따져보고 싶은 점이 많지만, 이 시의 의고적 정감의 어휘들은 그러한 논리적 질문을 무화시키고 독자를 공감의 영역으로 몰아간다. 노산 시조의 묘미와 특질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노산 시조의 또 하나의 특질은 함축성에 있다. 함축성이란 시의 본질적 특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대시의 전개가 이 함축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만 보아도시에서 차지하는 함축성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시에서 함축성이 강조된다는 사실은 근대 이전의 시가문학에는 이런 자질이 미약했음을 반증한다. 우리의 고시조 작품들은 대부분 있는 사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을 뿐 함축적 표현을 구사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현대시조가 함축성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시조의 현대성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梅花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
[개나리] 전문

이 작품의 제목 다음에는 "이 노래의 주인공은 마침내 서로 나뉘어 하나는 땅 속으로 돌고 하나는 異域으로 도는 내 누이와 내 친구"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애틋한 감정을 북돋기 위해 이런 설명을 붙였는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첨언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을 때 오히려 여러 가지 사연이 떠오르면서 복합적인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매화는 봄이 오기 전에 먼저 꽃을 피워 3월 말쯤이면 이미 지기 시작한다. 개나리는 봄이 오면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서 봄소식을 알리는 식물이다. 그러니 이 작품 속의 두 인물은 꽃을 매개로 하여 봄이 온 것을 서로 알린 것이다. 그런데 봄이란 말을 차마 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조의 묘미는 바로 이 의문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과 상상을 유발하는 데 있다. 제목 뒤의 설명처럼 사자와 생자 사이에 오간 상상의 편지라서 그럴 수도 있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지만 봄을 즐길 수 없는 상황이기에 /'/봄/'/이란 말을 쓰기 어려웠던 것일 수도 있다. 그 외의 다른 상상도 해 볼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든 /'/봄/'/이란 말을 차마 쓰기 어렵다고 한 것은 화자와 주인공이 처한 비극적 정황을 암시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비극적 상황의 구체적 단면은 감추어 둔 채 /'/봄/'/이란 말의 내포적 의미를 통해 함축적 표현을 한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
이러한 함축적 표현은 역시 가곡으로 작곡되어 널리 불리는 [고향생각]의 마지막 시행인 "때 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에도 나타난다. /'/때 묻은 소매/'/라는 짧은 어구에서 화자가 보낸 신산의 세월과 현재의 척박한 처지가 한꺼번에 환기된다. 이 시행으로 작품은 끝나지만, 그것을 통해 화자가 고향을 간절히 그리는 이유가 떠오르고 화자의 심정과 시상의 애잔함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함축적 표현에 대한 관심이 양장시조를 창작하도록 이끈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삼장을 압축하여 양장으로 구성할 때 시의 함축성이 더 고양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는 {노산시조집]에서 양장시조를 시험적으로 소개한 후에 말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편수는 아니지만 양장시조를 창작하였다. 그러나 삼장의 완결미에 바탕을 둔 시조 형식을 양장으로 바꾸어 놓으면 그것은 특징 없는 이행시의 연속이 되어 버린다. 그의 양장시조 실험은 언어의 함축성을 재치있게 살린 다음 한편이 의미를 지닐 뿐, 그 외의 장형의 양장시조는 형식적 실험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실패한 것으로 판단된다.

뵈오려 못뵈는 님 눈 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 지이다
[소경되어지이다] 전문

4. 조국애와 형식의 변화

{노산시조집}에 들어 있는 시조 중 그 당시의 현실 문제를 다룬 것은 거의 없다. 삶의 보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시인이 처한 당시의 현실을 암시한 작품으로 다음 두 편의 시조를 들 수 있을 뿐이다.

江山을 둘러보소 내집 없는 아우 兄들
등 지고 서로 헤쳐 가시는 양 보옵시오
해 진 뒤 돌아올 곳 있음을 부끄러워 하노라
[答友] 둘째수

거울 속 저 사람아 바로 뵈는 저 사람아
잘나나 못나나 간에 이제야 바로 너로구나
무삼 일 너 아닌 너로 너인 듯이 사나니

저와 남 다 속이는 이런 곳에 왜 사는고
안 속고 안 속이는 그런 세상 어데온지
있다면 千里萬里라도 거기 가서 살과저
[거울 앞에서] 전문

앞의 작품은 1928년 서울 효제동 토실에 살 때 친구가 찾아와 집이 누추하다고 걱정한 것에 화답하는 내용의 시조다. 조국 강산에 집을 잃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동포들이 많은데 누옥이나마 거처할 곳이 있음은 다행이고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된다는 내용이다. 뒤의 작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현실 생활 속에서는 자신도 남도 속이고 살 수밖에 없는데, 거울 속에서 오히려 거짓 없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됨을 개탄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많은 유랑민들이 집을 잃고 떠도는 당시의 민족 현실에 대한 이해와 자신을 속이며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세태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족 현실의 단면이 구체적으로 시조에 표현된 것은 없다.
그의 두 번째 시조집 {노산시조선집}(민족문화사, 1958)에는 {노산시조집}에 들어 있는 중요한 작품이 상당수 재수록되었고 1933년 이후의 발표작, 해방 이후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단 한 편의 예외도 없이 작품 끝에 창작 시점을 밝혀 두었기 때문에, 그 작품이 어떤 시기의 작품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이 시조집의 서문에서도 시조 창작에 영향을 준 부친의 일화를 소개하였다. 그와 함께 그는 시가란 개인의 정한을 드러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 대신에 /'/情恨은 길고 노래는 짧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밝힌다. 결국 시조 창작의 동력을 정한으로 잡은 셈인데 여기서 그의 시조가 정신의 측면보다 감정의 측면에 더 기울어진 연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정한의 가락으로 시조를 창작한 것이지 정신의 지향을 갖고 시조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육당과 뚜렷이 대비되는 노산의 특징이다.
{노산시조선집} 1부 /'/悲願/'/에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로부터 1958년까지 쓰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일제 강점기에 단 한번도 직접 토로된 적이 없었던 조국과 겨레에 대한 사랑을 곡진한 가락으로 펼쳐내고 있다. 그 중에는 [避難圖]나 [廢墟試帖]처럼 현실의 구체적 정황이 묘사된 작품도 있다. 이 시조집 첫머리에 실린 다음의 시조가 해방 후 노산 시조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너라고 불러 보는 祖國아
너는 지금 어드메 있나
누더기 한 폭 걸치고
土幕 속에 누워 있나
네 소원 이룰 길 없어
네거리를 헤매나

오늘 아침도 수 없이 떠나 가는 봇짐들
어디론지 살 길을 찾아 헤매는 무리들이랑
그 속에 너도 섞여서
앞 山 마루를 넘어 섰나

너라고 불러 보는 祖國아
落照보다도 더 쓸쓸한 祖國아
긴 긴 밤 가얏고 소리마냥
가슴을 파고 드는 네 이름아
새 봄날 桃李花 같이
활짝 한 번 피어 주렴
[너라고 불러 보는 祖國아] 전문

1951년 4월 18일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조국애가 담긴 노산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6·25 전쟁이 소강상태에 처한 시점에서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며 겨레의 고초를 안타까워하고 희망의 미래를 염원하는 심정이 짜임새 있게 형상화되었다. 노산 시조의 바탕이 된 정한의 가락은 근심 섞인 사랑의 감정, 비탄 어린 염원의 심정을 표현하는 데 최고의 기량을 발휘한다. 사랑과 염원의 간절함을 표현하려다 보니 시조의 기본형식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마디에 들어가는 음절수가 많아져서 호흡 양이 늘어난 만큼 그 부분에서는 감정과 의미의 상승이 유발된다. 이것은 해방 이전의 노산 시조에서 볼 수 없었던 형태적 변화다. 그러나 음절수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1 줄 4 음보로 구분되는 시조의 율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율독 구분에서 확인된다.

너라고 불러 보는 / 祖國아 / 落照보다도 / 더 쓸쓸한 祖國아
긴 긴 밤 / 가얏고 소리마냥 / 가슴을 파고 드는 / 네 이름아
새 봄날 / 桃李花 같이 / 활짝 한 번 / 피어 주렴

이처럼 감정이 가장 고조되어 시조의 기본 형식에서 벗어난 것 같은 셋째 수도 율독 구분을 해 보면 1 줄 4 음보로 구획이 가능하다. 시조의 정형성 내에서 호흡과 음률의 변화를 통해 조국애와 국토애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노산 시조의 경향은 세 번째 시조집 {푸른 하늘의 뜻은}(금강출판사, 1970)에까지 이어진다. 그 시조집에 실린 다음의 작품 역시 형식의 자유를 누리는 것 같으면서도, 1줄 4음보로 구획되는 시조의 기본 율격을 지키고 있다.

길이 끝났네 / 더 못 간다네 / 병정은 총 들고 /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 말뚝을 뽑고 / 이대로 북으로 / 더 가야겠소
바닷가 / 모래 위에 주저 앉아 / 파도도 울고 / 나도 울고
[길이 끝났네] 전문

노산의 후기 시조 중 기행시조나 생활시조는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전기의 시조와 별다른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 조국애를 노래한 일군의 시조들만이 형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시조의 형식 속에 고조된 감정을 담아내려 할 때 형식의 변화가 뒤따른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형식의 변화를 보인 이 작품들은 전통적 시조 율격의 범위 내에서 자유로운 음률을 구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범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 조국애를 주제로 한 작품이 지니는 대중적 호소력의 문제는 이것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펼친 고전국역사업이나 애국기념사업처럼 시대의 분위기에 호응한 국책적인 것이어서 시조가 감당할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다.
현대시조의 전개 과정에서 그는 형식의 자유를 열어보인 시인으로 기록될 만하다. 양장시조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1 줄 4 음보의 기본 형식 속에 율조의 자유를 실현한 그의 시조는 후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문장}(1940. 7)에 [달밤]이라는 고전적인 시조로 출발한 이호우가 전통 시조의 자수율을 넘어 율조의 자유를 터득한 것도 노산의 영향일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율조의 자유로움이 노산이 이룩한 큰 공적임에 틀림없지만, 노산 시조의 진정한 본령은 양주동이 지적한 대로 우리말 조사와 어미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이룩해 낸 /'/흐뭇한 가락/'/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34년 6월 7일에 쓴 다음의 작품은, 노산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노산만의 맛과 멋을 담은 작품이다. 이 /'/흐뭇한 가락/'/이 시조의 격조를 한 단계 높이는 동시에 우리 말 구사의 폭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五六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五六島라
흐리락 맑으락 하매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빈 바단데
오늘은 비 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五六島]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