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성명서]
아직, 깊고 어두운 물 속입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에 붙여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 깊고 어두운 물 속입니다. 양승진, 고창석,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이영숙, 권재근, 권혁규. 지금껏 돌아오지 못한 9명의 희생자들과 함께 우리는 깊고 어두운 물 속에 잠겨 있습니다. 가족을 잃고 세상을 잃은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과 함께 우리는 여전히 차갑고 캄캄한 진도 앞바다를 떠돌고 있습니다. 은폐와 회피와 모면에 암매장된 진실 때문에, 모욕과 겁박과 야유에 묵살된 생명 때문에, 이곳은 춥고 외롭고 슬프고 그립습니다.
따뜻한 밥과 국, 새로 나온 예쁜 과일들, 생전에 좋아했던 먹거리들을 상이 비좁게 올려 놓고 안타깝지만 따뜻하게 망자를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 말고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못 다한 삶을 누리라고 빌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아픈 마음을 걱정하면서, 그래도 안부를 물으며 유족들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세월도 무심하다 넋두리하며 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서로 쓰다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상복을 벗지 못했습니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고, 제대로 명복을 빌 수도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들은 1년 내내 거리에서 통곡하고 있으며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습니다.
애초부터 이 나라의 정부에, 법과 정치에 큰 기대를 걸진 않았습니다. 제대로 수습하고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세월호가 그렇게 어이없이 가라앉도록, 수많은 목숨들이 수장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겠지요. 그러나 이 나라는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훨씬 무능하고 부도덕했으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파렴치했습니다. 진상규명을 외치는 국민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여야간 타협으로 특별법을 통과시켰습니다. 몇 달 동안이나 어렵게 조직된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마저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무력화시키더니, 이젠 특별법 시행령이란 걸 밀어붙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 시행령을 뜯어보면 진상규명 자체에는 관심이 없으며 진상이 규명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년간 시간끌기와 회피로 일관했던 정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시행령을 내놓자마자 신속하게 피해자 배·보상기준을 발표했습니다. 4억이니 8억이니 액수를 떠벌리며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방기한 국가의 죄를 은폐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은폐되고 왜곡된 진실을, 마지막까지 지켜져야 할 인간다움의 권리를 돈으로 계량하고 호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세월호의 침몰은 이윤을 위해 생명과 안전을 무시한 정책의 결과물이며, 정부기관과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가 초래한 참극입니다. 가라앉은 배에, 억울한 죽음에 어떤 진실이 있는지 아직 아무 것도 밝혀진 게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아직 밝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배상과 보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세월호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구요? 특별조사위원회가 세금도둑이라구요?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인양을 포기하자구요? 아직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도 있는데 배·보상금부터 신청하라구요? 이 죽음을 가슴속에 묻으라구요? 여기가 진정 사람이 사는 나라입니까.
어떤 자각도 반성도 없이, 사건의 발생부터 수습과 대응까지 한결같이 작동하는 천박한 자본의 논리가 참담합니다. 바로 그 자본의 논리 때문에 우리는 304명의 죽음을 겪고 정의도 진실도 없는 삶에 절망했는데, 여전히 끄떡없이 뻔뻔한 그 자본에 우롱당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정의를 지키며 살고 싶다는 소망도 배반당했고,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온 일상의 가치도 유린당했습니다. 이 수치와 모멸을 잊지 않겠습니다.
문학의 무력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습니다만, 살아가는 내내 우리는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아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저 뻔뻔하고 오만한 자본과 국가권력을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기억에는 시효가 없고 진실에는 한도가 없습니다. 차가운 바다를 떠도는 원혼들과 함께 이곳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지옥인지 오래오래 말하겠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말, 작은 생명 하나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매일 돌보겠다는 뜻입니다. 기억하겠다는 말,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무한한 용기를 가슴에 새기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봄입니다. 천지에 꽃잎 흩날리고 새로 난 초록은 변함없이 눈부시지만 아직 이곳의 봄은 적막한 회색입니다. 일 년 내내 잔인한 사월을 살고 있습니다. 봄의 기억을 잃어버린 온 국민이 피해자입니다. 함께 핍박당하고 모욕당했으니 함께 분노하고 요구합니다. 1주기를 맞고도 차마 애도도 추모도 할 수 없는 참담함 잊지 않고 끝까지 추궁하겠습니다.
-정부는 모든 방해책동을 그만두고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보장하라.
-실종자의 목숨과 유가족들의 슬픔을 더 이상 모욕하지 말라.
-신속히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고 한 점 의혹 없이 진상을 규명하라.
2015년 4월 15일
한국작가회의
성명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