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해산에 대한 한국작가회의의 논평]
헌재의 결정이 불러올 민주의 퇴행을 우려한다
정당 해산에 관한 결정을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맡긴 것은 소수정당 보호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조처였다. 행정부나 특정 권력이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정당 등을 함부로 해산하거나 제재하지 못하도록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기관에 최종 판단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19일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헌재는 스스로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역할을 포기했으며, 이로 인해 민주주의 수호라는 원칙도 붕괴되었다. 헌재의 판결문은 대부분 추정과 비약으로 채워져 있을 뿐, 헌정 최초의 정당 해산이라는 초유의 결정을 뒷받침할 근거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피땀 흘려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정당해산을 반대한다는 1인의 소수의견만이 그나마 현재 대한민국의 법과 원칙을 가까스로 증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법리적 해석의 문제점이나 모순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헌재의 결정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헌법이 규정하는 ‘민주적 기본질서’란 다수의 의견에 반하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국민의 판단에 의해 그 의견의 가치와 의미를 결정할 수 있다는 원칙에 다름 아니다. 공식적 절차에 의해 성립된 정당을, 수차례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배출하기까지 한 정당을 강제로 해산해도 좋다는 선례는 앞으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정치적 의견제시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국가가 제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스럽다. 개인이나 단체의 사상을 법이 판단하고 강제로 금지함으로써, 사상의 자유가 존중되기보다는 그것을 함부로 판단하고 금지하며 적대시하는 관행이 고착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리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나와 다른, 혹은 기존의 질서에 어긋나는 사상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성취된다. 법은 이런 민주주의를 지키고 가꾸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강자의 이익을 위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그 누구라도 소수라는 이유로 억압받거나 배제되지 않도록 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국무회의의 결정에 따라 해산심판이 청구되었고, 압도적으로 정부여당의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구조의 헌재 재판관들에 의해 해산이 결정되었다. 우리는 헌재가 내세우는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판단기준이 혹시 ‘현재의 권력질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삼권분립의 원칙도 무색하게 대통령은 현재의 결정을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치켜세웠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이 원하는 민주주의와 다른 것인지, 이 말의 역설이 씁쓸하기 그지없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번 결정에서 이승만 정권 하의 진보당 해산이나 박정희 정권 하의 유신헌법을 떠올렸다. 권력을 독점하고 유지하기 위해, 지난 독재정권들을 하나같이 반공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헌재를 앞세웠지만 그 뒤에는 권력의 독점과 유지를 위해 여론을 조작하고 적대를 과장하는 현 정부의 위험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이번 헌재의 결정을 쉽게 용인해서는 안 된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민주주의를 삶의 원칙으로 지켜내는 국민의 저력이 필요한 때이다.
“김일성 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라고 4.19 이후 김수영은 썼다. 독재를 물리친 민주주의의 승리에 모두가 취해 있을 때, 김수영은 아직 여기에 없는, 더 많은 자유를 상상했다. 가능한 한 더 많은 자유가 최대한 허용되는 나라, 수많은 자유들에 의해 다른 자유들이 이해되고 판단되는 나라, 그런 나라를 원한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이땅의 참다운 민주주의이다.
2014년 12월 23일
한국작가회의
성명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