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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을 전면 폐지하라!
국가보안법은 그간 우리들이 밑줄을 그어가며 당당하게 ‘시’(詩)라고 노래했던 그 신성불가침한 가치를 수십 년간이나 파괴해 왔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젊어서 한창땐
우라지오로 다니는 밀수꾼
눈보라에 숨어 국경을 넘나들 때
어머니의 등곬에 파묻힌 나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젖먹이와 다름없이
얼마나 성가스런 짐짝이었을까?
이용악의 시 <우리의 거리>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시이다. 밀수꾼의 추억도 긍지로 삼을 수 있고, 범죄자의 과거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살이의 이야기 속에 가득 찬 떨림과 아픔, 고통 밑에 있는 내면의 저 나지막한 소리가 시(詩), 시라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바로 그곳에 접근금지 구역을 만들어 왔다. 국가보안법은 바로 그곳에서 싹트는 희망의 발길 앞에 지뢰들을 놓아 왔다. 그리고 그것은 순간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고, 국가보안법의 존재를 망각한 자들의 발목을 잘라왔다.
우리는 오늘 작가의 명예를 걸고 증언하고자 한다.
국가보안법이 문제 삼는 것은 국헌문란 목적의 내란, 폭발물에 의한 테러, 국가기관의 기능마비를 가져오는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먼 거리에 있는 무형의 것을 심판한다. 그런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표현이고 주장이요, ‘위험성을 유발할 위험성’이다. 그리하여 국가보안법이 남긴 업적이 있다면 비열한 색깔공세와 불법연행, 장기구금, 고문과 조작이었으며, 그것이 국민에게 경험시킨 것이 있다면 우리의 의식을 심층에까지 내려가 억압하고 자기검열을 강요하는 통제장치의 기능이었다. 그것은 정말 얼마나 무서운 인간성에 대한 침탈이며 민족성에 대한 학대인가!
기억하라. 이 같은 악법이 없다 해도 우리는 사상의 자유를 구가하기 어려운 상처투성이의 민족이다. 냉전의 감정, 전쟁과 굶주림, 이념갈등으로 인한 비참한 인간 모멸에의 기억……. 20세기를 체험한 우리 모두의 내면에 이것은 음험한 공포로써 존재한다. 그 위에 마치 강물에 금을 그어 물고기를 통제하는 것처럼 무모한 법규를 강요하면 인간의 의식은 자유를 잃는다.
조국에 대한 불평도 잠꼬대 안에서는 가능해야 한다. 우리가 신봉하는 절대가치에 대한 신념들도 취중에는 더러 야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성을 구성하는 잠재 욕망의 것이고, 그것의 무한한 보장 속에서만 민족․국가․정부․공동체 따위는 수호될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외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과 행위 안에는 이성과 교양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야성(野性)의 지대가 있다. 욕설․잠꼬대․넋두리․농담…… 이 같은 것들이 냉전지대에서는 가끔 불온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명심할 일이다. 그것은 성자들의 내면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고상한 정치지도자들의 가슴에도 있으며, 모든 주권자들의 심장 속에도, 또 모든 시대와 정권 속에도 들어 있다. 바로 그것까지를 건드려서라도 정치적 경쟁자들을 약화시키는 것이 한국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의 20세기적 속성이요 국가보안법의 존재이유였다.
도대체 어느 나라에 이 같은 악법이 있겠는가? 국가보안법과 함께 살아온 기나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긴장에 시달려 왔는가? 우리는 수시로 저녁의 어두운 거리를 지나며 나무들과 건물들 위에서 하늘이 소용돌이치고, 그 너머에서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분단사회의 광기를 보고는 했으며, 어떤 검은 새의 날개가 늘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따라다니는 듯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공동체로부터 사랑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우리들이 망설이고, 염려하고, 자기검열을 하는 사이에 우렁차고 위대한 홍익인간의 음성은 한국인의 내면으로부터 물러나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분명 우리 사회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매우 위험한 증상들 중 하나이다.
우리가 21세기로 넘어가는 길에 앞장서 걸어야 할 당국이여! 여․야 정치인들이여! 국가보안법이라는 이 지독한 야만에 대한 향수를 버려라! 부디 민족적 불행을 이용하지 말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정치하라!
2004년 10월 9일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염원하는 작가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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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