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SCRIPT Language=JavaScript src=http://php.chol.com/~wanho/bbs/data/poem/esuyoil.js></script> 오늘(10월 15일) 작가회의 공지사항 칸에 들어가 보니 10월 3일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던 나의 칼럼이 전재되어 있군요. ‘이념적 성숙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썼던 그 글은 신문에 게재되면서 조금씩 가지치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길이가 조금 길었던 탓인데, 그렇게 손질을 해놓고 보니 원래의 뜻과 뉘앙스에 약간의 손상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몇 마디가 잘려나간 것이었지만, 글쓰는 사람으로서는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잘리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의 두 주일 전에 썼던 글이라 시효가 지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기왕 전재할 바에는 여기 원래 썼던 글로 대체합니다. (염무웅〕

이념적 성숙을 위하여
염무웅

여러 차례 귀국시도가 좌절된 끝에 드디어 송두율교수가 가족과 함께 환한 얼굴로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스물서너 살 새파란 나이에 떠난 고국을 머리털 희끗한 예순 가까운 몸으로 돌아온다는 그 세월의 중량감 때문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독일에서 7,80년대 한국정부에 대한 비판활동을 주도했을뿐더러 십수 차례 북한을 내왕하면서 친북적인 언행도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의 입국을 대한민국 정부가 허용했다는 사실의 역사적 상징성이 우리에게 어떤 자신감과 뿌듯함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국정원 조사를 받게 되고 그 일부 내용이 아주 선동적인 방식으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태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 국회 다수당의 대표는 송교수를 “해방후 최고위급 간첩”이라고 규정하면서 그의 사법처리를 요구하였고,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한 신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송교수를 사상적으로 좌익일뿐더러 인간적으로도 음험하고 배신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오랫동안 송교수를 옹호해 왔던 한 신문도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그의 처신에 문제가 있었음을 충고하고 있다.
물론 나는 그의 신분에 관한 실체적 진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주류언론들이 국정원 조사내용이라고 하면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송두율교수는 1973년 처음 입북할 때 노동당에 가입하였고, 1991년 사회과학원 강의를 위해 북한에 머무는 동안에는 김일성주석과 서너 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북측의 특별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무렵 그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지명되었다는 것이 황장엽씨의 주장이고 최근 일부 언론의 단정이다.
만약 이러한 보도들이 사실이라면 그는 일정한 사법적 절차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그는 김철수라는 가명(code name)의 사용, 후보위원 지명의 인지와 수락 및 공작금 수령에 대해 일관되게 부인하고 있다. 다만 그는 노동당 입당에 대해서만은 1970년대 북한의 관례상 소정의 입국절차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입당원서에 서명했음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조선노동당 당원이라고 의식하거나 당원으로 활동한 적은 전무하다고 주장하였다.
송두율교수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보수야당과 거대언론들이 그의 국정원 진술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판별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를 간첩으로 모는 것은 터무니없는 모략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지난날 공안기관 책임자가 대공사건에 대해 발표하듯이 다수당 대표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격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책임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과 더불어 납득할 만한 객관적 증거를 함께 제시해야한다.
앞에서 나는 송두율교수가 여러 차례 북한을 내왕하면서 친북적인 언행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우리의 현실에서 ‘친북적’이라는 규정은 심각한 오해를 불러올 수 있고 때때로 치명적인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송교수의 경우 이 용어는 결코 ‘반남한적’이라는 개념으로 등치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일찍이 1980년대 초에 그가 북한사회를 북한 자신의 논리로 해석하는 내재적 접근법을 제시하여 연구방법의 새 차원을 열었다고 평가받았는데, 사실 그의 내재적 접근법이 겨냥한 것은 북한만이 아닌 남북한 전체의 현실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남북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자신의 비정형적(非定型的) 정체성을 인식하고 이 불안정한 위치를 통일운동의 매개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냉전시대의 이분법으로 재단할 때 이것이 때로는 ‘친북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 수십년 동안 치열한 민주화투쟁을 통해 대한민국은 놀라운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불행히도 조국의 반쪽인 북한사회는 그러한 의미의 자기쇄신 과정을 충분히 겪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적어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북한 내부에 어떤 의미있는 변화가 있었다는 실감이 전해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단순비교의 대상도 아니고 양자택일의 선택지인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성급한 통일의 열망을 자제하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또 평등과 우애와 관용이 지배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절실할 것이다. 송교수의 귀국이 일으킨 파문이 보수기득권 세력의 정치공격 도구로 악용되지 말고 우리 사회의 이념적 성숙에 기여하는 계기로 선용될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