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길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그런 날들이 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누군가의 영혼과 미치도록 말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순간에 읽어야 한다. 나는 그런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오지 않는 차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는 소도시의 어느 한적한 대합실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이 책을 꺼내 읽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뭔가에 구원받고 싶어 여행을 떠나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집에서 읽고 싶다. 서점에서 나만의 보물을 발견한 듯 서둘러 이 책을 가슴에 안고 길가에 웅덩이가 있다면 날아가듯이 건너 집에 돌아올 것이다. 얼른 집에 가서 한잔 하고 싶은 어느 사진 속의 술꾼처럼 책을 들고 날아가듯이 물웅덩이를 건너 집으로 돌아가서 첫페이지를 펼치는 나 자신을 상상할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영혼에 금이 간 한 청년과 만날 수 있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밀스런, 하지만 자신의 비밀스런 상처로써 세상과 만나고 꿈꾸는 한 맑은 청년과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펼치면 1996년 2월부터 2012년 지금 이 순간까지, 열아홉에서 삼십대가 된 꿈많은 한 청년이 병(病)에 신체와 영혼이 금이 가면서 겪게 되는 섬세한 이야기가 육성으로 흘러나온다. 이 책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그 몸에서 흘러나온 맑은 피로 쓴 영혼의 수첩이다. 자신의 병을 개인의 아픔에서 타인의 아픔으로 앓고 풀어내는 과정은 억눌린 영혼들이 그 서러움과 울분을 신명으로 승화해내는 ‘아라리’의 가락을 떠올리게 한다. 열아홉의 청년이 공황장애를 앓게 되면서 비롯된 불행이 시(詩)와 만나면서 나의 아픔에서 ‘우리-같이 아픔’으로 나아가는 연대(連帶)와 병든 세계의 구원의 문제로 확대되는 맨몸의 육성은 슬프고 처절하다.
하지만 그 아픔의 소용돌이에서 아픈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게 만드는 맑은 영혼이 떠올라오고 ‘아픈 것들이 내뿜는 환한 빛이 느껴진다.’ 하여 이 맑은 청년 시인의 이 책에서는 ‘말하니까 생각나네’ 하는 그런 한 개인의 울분과 서러운 이야기들이 우리 모두와 한덩어리가 되어 신명이 되는 아라리의 가락이 넘친다. ‘말하니까 생각나네’라는 이 말은 병을 앓는 자식을 위해 ‘약봉지 치운 자리에 아무 말 없이 밥상을 가져다주시는 어머니’의 말씀이시다. 그렇게 어머니와 가족과 타인은 한 개인의 불행과 원망으로서의 ‘말하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 그 고통들’을 세계를 감싸안는 시인의 언어로 태어나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아픈 한 영혼이 세계의 아픈 영혼들에게 사랑과 연대로 나눠주는 씨앗이다. 우리가 영혼을 다치기 쉬운 날엔 길에서 집에서 이 책을 읽어야 하리.
―박형준(詩人)
죄가 미워서 죄인을 미워하듯이 우리는 병이 두려워서 병자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병을 두려워하는 건 병자에 대한 우리의 그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거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기 병을 숨기려 든다. 숨기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병자는 괴로울 뿐만 아니라 외롭다. 그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고통도 리듬을 타면 음악이 되는 것’, 제 병의 고통을 시로 만들어버린 박진성이 이번 산문집에서 마치 목숨처럼 근원 모르게 깃들은 병의 생김새, 움직임, 작용, 파장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차라리 병에 탐닉하고 병증에 중독되던 그가, 시인에게 공기와 다름없는 ‘언어’를 잃을지 모를 상태에 이르렀을 때의 공포와 절망감! 박진성은 그 지경에서 궁극적으로 병은 ‘내가 아픔’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거대한 구멍이라 깨닫는다.
글 전편이 파르르 떨리고 지지직거리는 신호음으로 가득하다. 우주 저편 어딘가 있을 외계 생명체를 향해 신호를 보내는 무한 채널 전파망원경처럼. 어딘가 골방에 자신을 가두고 있을 환우(患友)들을 향해 보내는, 그들을 밖으로 불러내려는 신호음. 때로 그것은 구조를 요청하는 SOS 같기도 하지만, 글쎄, 박진성의 산문은 요즘 성황 한다는 SNS 아닐까? SNS나 SOS나 그게 그거다. SNS는 쌍방향 SOS인 것 같다.
박진성이 심하게 앓은 병의 이름은 공황장애인데, 내 주위에도 뜻밖에 그 병을 앓는 사람이 많다. 공황장애가 아니더라도, 휴…… 나를 비롯해 성한 사람이 드물고나. 우리 모두 삶을 앓고 있는, 세상을 앓고 있는 환우들-환형환제(患兄患第)들이다. 박진성의 이 산문 아라리는 환우-환형, 환제들에게 보내는 SNS다.
- 황인숙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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