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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무렵 돌아가신 할머니는 오롯이 기억하건만, 내가 다섯살 무렵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는 가물가물하다. 아니 사실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그저 어른들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다. 내 기억에 없는 당신을 화제 삼아 말하는 걸 듣기만 해야 하는 것도 퍽 곤혹스러운데, 그건 마치 내가 당연히 기억해야 할 추억을 부주의하게 망각해버린 걸 책망하는 듯해서이다. 어쨌거나 나는 할아버지를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으로만 추억할 수 있다.
내 고향은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 자락에 있는데 요즘처럼 찬바람 부는 계절이면, 서정주 시인의 표현대로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 푸르른 날들이면 하루쯤 날 잡아 단풍놀이를 갔던 모양이다. 단풍그늘 아래 두루마기 차림의 할아버지와 그 옆의 어린 나. 붉게 물든 단풍보다 더욱 검은 빛이었던 할아버지의 얼굴. 그 얼굴을 지그시 보고 있노라면 유전의 흔적을 엿볼 수도 있는데 더 설명할 것도 없이 그건 바로 가난의 흔적이다.
놀이와는 담 쌓고 산 사람답게 어색한 얼굴들이 수십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층을 두고 나란히 둥둥 떴다. 물론 나는 기억할 수 없다. 단풍놀이도, 그날 어떤 대화들이 오갔는지도. 필시 나는 찬바람 부는 날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단풍놀이랍시고 산이나 오르는 게 못마땅해했을 테고, 그처럼 칭얼대는 나를 달래기 위해 할아버지는 쌈짓돈을 꺼내 막대사탕 하나쯤 내게 쥐여 줬을 거다.
진심으로 궁금하다. 기억할 수 없는 유년시절의 나날들.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말했듯 ‘네 할아버지께, 내년에는 공부를 잘하겠다고 약속하렴, 아가야. 내년에는 그 할아버지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단다’라는 충고에 귀기울이지 않았을, 지나고 나서야 몸서리쳐지게 그리워질 내 유년의 한 컷들.
<2010.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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