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인터뷰라는 걸 하는데 잡지사 쪽에서 옛 사진 몇 장이 필요하다기에 고향에 들른 김에 오래된 앨범을 뒤적였다. 먼지가 더께로 내린 앨범을 펼치니 우리 가족의 과거가 빛바랜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시절 우리 가족은 지금보다 훨씬 궁핍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그리 나아진 건 아니지만 배 곯을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 시절 고향 사람들치고 늘 배불리 먹을 만큼 삶이 한갓진 이는 드물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도 희망이 없었다.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휘고 발바닥에 굳은살이 두껍게 자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 고향 사람들은 수치를 알았다. 사립문이 훤히 열렸어도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남의 채마밭 푸성귀에 맺힌 이슬마저 주인의 땀방울로 여겼다. 노력한 만큼을 원했고 시절을 탓하기는 했어도 세상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딱히 후손에게 물려줄 재산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대신 그들은 대를 이어 수치를 느낄 줄 아는 능력을 물려주었다. 그들에겐 해외 출장을 가면서 데리고 가 줄 힘세고 권력 있는 할아버지는 없지만 언제나 그들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으며 그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줄, 힘도 없고 권력도 없지만 비열하지 않은 피붙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가계는 그런 방식으로 불멸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불멸의 존재라는 것은 그가 연민하고 희생하고 인내할 수 있는 정신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대를 이어 이곳에 살아남는다면 그건 우리의 가계가 고귀하거나 부유해서가 아니다. 진짜 인간이기 때문이다. 연민하고 희생하고 인내할 줄 알며 비열해지는 것을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계는 집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영혼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2010. 02. 02>
|
문학 in 미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