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그믐을 전후한 밤의 숲은 먹물 휘장을 둘러놓은 것 같습니다.

첫눈이 내리고 난 뒤 하늘은 늦도록 구름을 벗지 못해 흐리게 누워 있고, 추워진 날씨 탓에 짐승들도 거동을 삼가고 새들도 입을 닫아 숲은 적묵(寂默)의 사원입니다.

이런 적멸의 어둠 속에서 여러 번의 가을 겨울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별빛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되었습니다.

별빛이 왜 정겹고 따듯한 은유로 다가오는지, 왜 고대인들은 점성술을 익히게 되었는지, 별들이 왜 그렇게 많은 신화의 바다가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어둠을 이기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었을 겁니다. 공포이고 두려움이며 고통의 시간인 어둠 속에서 별빛은 얼마나 큰 위안이고 아름다움이었겠습니까?

별자리를 만들어 내고 그 별자리마다 이야기를 붙여주고, 그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동안 두려움은 아늑함으로 바뀌곤 했을 겁니다.

등불을 매달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얼마나 그 불이 대견했겠습니까? 별 없는 밤에는 그 불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지난 해 가을부터 제가 있는 숲에도 가을이면 나뭇가지 사이로 등불이 보입니다.

부엌에서 일을 하다 작은 창 너머로 고개를 돌리면 산비탈 위로 주홍빛 작은 등불 하나가 깜박깜박거리는 게 보이곤 합니다.깜깜하던 숲에 산비탈의 작은 불빛 하나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지요.

그 불빛 아래서 난로에 장작불을 지피고, 차를 끓이고,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은 훈훈해져 옵니다. 많은 이들이 도시로 몰려가고, 대도시 사람으로 편입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그들은 정반대로 산골에 들어와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한 귀퉁이에 음침하고 무뚝뚝하고 으스스할 만큼 냉정한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구석에서 작은 빛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비록 작기는 했지만 그래도 빛은 빛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곳에 갖다 놓았는지 빛은 그 자리에 선 채 사방을 비추었습니다.

지나가던 길손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하느님께 버림받은 이런 외딴 구석보다 다른 곳에 더 쓸모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왜 그런 생각을 해요? 나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빛나는 것은 내게 빛나는 기쁨, 빛이 되는 기쁨을 주기 때문이에요." 빛이 말했습니다.

윌리 호프수에머는 「외딴 구석의 빛」에서 빛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작아도 빛입니다.

빛은 어디에 있어도 빛입니다. 빛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빛을 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빛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존재의 이유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어둠도 빛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지난 달 어느 작은 모임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이현주 목사님이 책갈피 하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책갈피는 손수 쓰신 글씨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一燈能除千年暗" 이라는 일곱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등 하나가 천년의 어둠을 다스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등이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기도 하고, 어둡다는 것이 사리에 밝지 못한 것을 일컫기도 하니까, 불빛 같은 성현의 가르침 하나가 오랜 세월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사는 이들의 지혜를 밝혀준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고맙게 가슴에 새기기로 했습니다.

시대의 어둠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어둠을 이기는 길은 우리가 저마다 작은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을 욕하기보다 촛불 하나 밝히는 게 낫다"고 합니다. 이 밤 저마다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씩 작은 등이 되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2009.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