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 시인의 첫 시집 [캥거루의 집]
(시평사, 2005년 11월 1일)

디아스포라(diaspora, 離山) 문학으로서의 재외 한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근래에 들어오면서 본격화되고 있다. 식민지, 분단의 역사적 격변의 과정에서 국외로의 수많은 이산을 배출한 민족으로서, 디아스포라와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한 근래의 관심은 어쩌면 때늦은 감이 있는지도 모른다. 분단 이후의 디아스포라 작기들은 탈영토화된 영역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육사, 윤동주 등 식민지 시기 작가들과 공통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가진다.

반면 분단 이후 디아스포라 작가들은 주권회복 등과 같은 구체적 지향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선 분단 이전 디아스포라 작가들과 차이를 보인다. 이들에게 민족, 고향은 특정한 정치의식, 공통의식으로 결합하고 주권국가로 구체화된 장소이기보다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안식처에 가깝다. 모국의 귀환도 그렇다고 정주국으로의 동화도 아닌 그 경계선에서 부유하는 자의 발걸음,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육체적 정신적 상흔들은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 이전의 시원적인 것을 지향함으로써 치유될 터. 이는 김준오 교수의 말을 인용해서 말하자면 자아와 세계의 상상적 공간에서의 합일 추구라는 서정시의 본질에닿는 길이 될 것이다.

디아스포라인 김오의 시집 [캥거루의 집]은 경계선에 서 있는 이의 시집이다.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이란 집을 갖지 못했다는 것, 또는 집까지 갈 길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는 경계선에 서 있는 이가 부유하는 삶을 자신의 숙명으로 감뇌하고 견뎌야 함을 의미할 터. 문학인을 떠난 일반인으로서의 김오라는 사람 개인에게는 불행일지 모르지만 문학적으로는 그 반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계선에 서서 서성이는 혹한의 흔적을 가슴 속에 찍어놓은 이가 부르는 언어란 거짓의 언어, 포즈의 언어와는 전혀 결을 달리하는 언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눈물보다 날카로운 / 칼 하나 깊이 품고" 고국과 타국 사이 경계선에서 떠도는 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김오 1956년 경기도 동두천 출생. 1987년 호주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으며, 1993년 호주동아일보 신년문예에, 1999년 [자유문학]겨울호 신인상에 각각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책 속에서

캥거루의 집
이민일기

오늘 일어서는 것은
아직 기다려야 할 바램이 남았기 때문이다
살아온 세월
가슴에 충분히 부풀지 못하였으므로
두 발로 서서는
숨을 곳 없는 들 같은 산등성이에
집을 만드는 두려움
누구나 가까이 엿보고 가는
가시덤불 하나 없는
밋밋한 풀과 바위 틈새에 피를 흘려놓고
귀, 눈을 치뜨고 있어도
천천히 번지고 엷어지는 피의 흔적들 위에
지난밤 비는 내려
어디로 끌고 갔는지 눈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다
해도, 피는 비를 뚫고
빗속에 살아있을 무엇으로 여전히 남아
사방으로 흩어지다 공중으로 일어서는
신기루의 자식들처럼 살아나
멀리 얼어붙은 땅끝에서 손을 비비고
뜨거운 몸 사막을 가로지르다가
어느날
네 발로 달려가며 야성의 이빨 드러내 줄
어느 한 녀석이 있을지 몰라
가슴에 가리운
앞발에 힘을 주고 풀로 바위를 덮는다


::시인의 말

오래 전, 삼십 년 안쪽에서 들었던 '한의 극복'이라는 말과 '이제 더는눈물을 가르치지 말라'는 글을 어렴풋한 헤아림으로 가슴속에 새긴 적이 있다. 그로부터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난 아직도 눈물을 미소로 승화시켜 얻어낼 시의 힘을 얻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내가 느끼는 심성을 전한다면 결국 내가 지닌 것부터 말할 수밖에 도리가 없겠다. 내 시의 첫출발이 이렇게 이민 와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눈물로 출발할 수밖에 없는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찌 보면 첫 시집을 조금 늦게 내는 편이지만 앞으로 갈 길을 생각하면 꼭 게으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가져본다. 오히려 섣부른 감상이 읽는 이로 하여금 조급함으로 비치지 않을까 저어되는 바가 크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꿈꾸고 있다.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바다를 건너와 새로운 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민은 우리가 꿈꾸던 자연과 환경보다 먼저 만나야 하는 것들이 있다.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부스러기와 털어버릴 수 없는 고국의 연결 고리들, 그것들이 놓아주지 않는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옛 이야기와 사랑들 이런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되는 것들과 먼저 다툼을 시작해야 한다.
서울에서 누렸던 기쁨을 고스란히 움켜쥐고 새로운 즐거움을 손에 얻으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이 눈물이다.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지 않는 고국과 타국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간해선 서로 친밀하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호주에 건너와 새 삶을 사는 여타의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그러니 어떻게 눈물을 이야기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캠거루처럼 힘이 없고 두려움뿐인 동물이 되어 숨을 곳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끝없는 대지를 바라보면 언덕은 높아 보이고 야성의 힘은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막막함 위에 아이들은 자꾸 나와는 다른 세계를 향하여 달려가고 새 세계에 눈을 돌리는데... 그래도 모든 일상이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시집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과 모국어를 붙들고 오늘도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을 시드니의 선배, 동료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시는 흔자 쓰는 일이라지만 돌아보면 언제나 마음에 마음을 기대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이 결국 먼길 가는 힘이 된다.

2005년 가을
호주 시드니에서 김오


::추천글

정처가 있든 없든 사람의 마음은 늘 문밖을 떠돈다 하던가. 고향이 조국이고 조국이 고향이건만 금세기는 사람들을 고향의 문밖과 조국의 문밖으로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내몰아서 방언도 모국어도 아예 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물신의 언어에 중독되어서 괴성을 지르며 멀리 도망치는 꼴을 서로 보면서 경악하는데, 이미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고 조국을 떠난 시인 김오는 그래도 자신의 방언과 모국어로 순정한 정서의 문법을 세우고, 이국의 낯설고 경이로운 삶의 면면을 아름다운 시의 형식으로 바꾸어놓는다.

굳이 '이민문학'이라고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겠으되 우리나라 이민사도 한 세기를 넘긴 만큼 "별들이 내려오는" 시드니 근교 블루 마운틴에서 "찰랑찰랑 / 풍경이 되는 / 쓸쓸해도 마음놓이는 길"의 안흥리로, 타향과 고향, 타국과 조국으로 왕래하는 상상의 연(緣)이 유정하게도 질기고 세세하니, 김오 시인의 이 시집을 '이민시편'이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겠다. 그가 고단한 이민의 생을 펼쳐놓는 가운데 보았을 오세아니아 대륙의 시드니를 비롯한 한인 밀집지역의 삶의 축제를 담은 시의 행간을 읽으면 외려 그가 이민자로서 느꼈을 쓸쓸함이 그곳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에게 짚이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하종오(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