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하종오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님 시집]
(애지, 2005년 6월 25일)

시 쓰는 일을 일생의 업으로 삼고 있는 하종오 시인의 열두번 째 시집 『님 시집』이 애지에서 출간되었다. 대전의 출판사인 '애지'의 애지시선 시리즈 첫 옥동자인 이 시집은 중앙문단의 중견시인이 지역간 경계를 스스로 타파하는 쾌거라는데 자못 의미가 크다.

시집 출간이 중앙으로 몰려있는 요즈음 '중앙문화/지방문화'의 시대착오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 버릴 때만이 돌 속의 내장을 뚫고 들어가 만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 라는 야심찬 기획으로 출발한 애지시선은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선(先)인세를 지급하는 등 야무진 편집과 디자인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애지의 작업에 하종오 시인이 동참한 이유는 만인을 님으로 모시고 있는 『님 시집』시정신과 맞물려 있다.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지역문학의 활성화를 너나없이 한 목소리로 주창하면서도 정작 그 지역의 좋은 시인들은 모조리 서울에서 시집을 출간합니다. 물론 지역출판사의 열악한 자본력이나 편집 기술력 등이 낙후된 탓에 기획출판을 못하는 데도 그 원인이 있겠습니다만, 저 자신부터 반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게지요.

대전이 제 출생지도 아니고, 『애지』의 지향이 제 시의 지향과 동일한 것도 아니어서 당혹스럽기까지 했는데, 지역문학 활성화에 보탬이 된다면 기꺼이 수락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또 모르지요. 서울에서 시집을 내면 제대로 평가를 받고 지역에서 내면 평가를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생길지도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런 평가는 못 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시인은 시로 평가를 받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님으로 가득한 환하고 애틋한 세상을 꿈꾸고 있는' 시인이 단지 시 속에서의 읊조림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의 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하종오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 1980년부터 '反詩' 동인으로 활동했고, 1983년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지은 책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 <님시편>, <쥐똥나무 울타리>, <사물의 운명>, <넋이야 넋이로다> 등이 있다.

::책 속에서

제1부 제5편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님께서 만드시는 영역과 그이가 만드는 영역은 접해 있었습니다. 그 틈새에서 붉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그이가 네 다리로 엉금엉금 걸어서 달을 향해 갔습니다. 나무들은 뿌리로 성큼성큼 걸어 그이를 뒤따랐습니다. 눈에 덮인 잎들이 부스럭거리며 나무들을 뒤따라가고, 흙 속에 묻힌 열매들이 웅성대며 잎들을 뒤따라갔습니다. 그이가 그 틈새에 다다랐을 때, 달은 더 높아져 있었습니다. 그이가 달빛 받아서 먹으면 모두 달빛 받아서 먹으니 붉은 달이 스르르 내려와 그이 몸 속으로 들어가 저물었습니다. 그 한 순간, 그이가 두 다리로 벌떡 서서 두 손을 높이 쳐들자, 나무들의 가지에 잎들이 날아올라 붙어서 팔랑이고 열매들이 뛰어올라 붙어서 익어 갔습니다. 그이는 나무들을 놔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님께서 만드시는 영역과 그이가 만드는 영역 그 틈새에 신생이 있었습니다. 모두 그것이 있다고 꼭 믿었기에 두 분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래저래 살아갔습니다.

::시인의 말

이 시집에 나누어진 세 개의 부에 등장하는 3인의 님, 그이와 저이는 모두 내가 살던 강화도 마을의 주민들이다. 논과 밭을 갈아먹는다는 점에서 신분은 같지만, 그들은 출신과 형편과 지향이 다르고, 그리고 생의 방편이 달랐다. 그들 중 더러는 토박이로 늙고 병들어 죽었고, 더러는 물려받은 전답이 작아서 남의 땅을 부쳐먹거나 막노동을 했고, 더러는 땅값이 올라 부자가 되었는데도 농사를 지었고, 더러는 땅을 팔아서 탕진하는 바람에 다 털고 외지로 떠났고, 그 자리에는 외지에서 들어온 새로운 주민이 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너나 나의 같은 모습이면서도 다른 모습이었고, 너희나 우리의 다른 모습이면서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萬人이었다.

내게 운문정신이라는 화두를 세우게 했던 님 시리즈는 外篇, 內篇, 前篇, 本篇, 後篇으로 이루어진다. 이 [님 시집]은 前篇에 해당하는데, 2000년 말과 2001년 초에 걸쳐 겨울 동안 써서 2004년 <현대시학>지에 분재했던 것을 일부 고쳐서 묶었다.

운문정신이여, 여전히 내게는 님이 현실이고 현실이 님이다.

-하종오

::추천글

하종오 시인의 시에는 '의금상경(衣錦尙絅)'이 있다. 속에는 비단옷을 입었으되 겉에는 수수한 옷을 걸쳐 그를 감싼다. 시경(詩經)에 있는 말이다. 반짝거리거나 목청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음악으로 치자면 통주저음(通奏底音)이다. 리얼리즘의 행간을 그렇게 통과한다. 그렇다고 엄숙한 포즈의 그것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그저 소박한 마을 이웃들과 '너나들이'로 '시시닥거리는' 인인애(隣人愛)가 사뭇 정겹다. 거기 그의 '님'은 있는 듯 없는 듯 편안하게 자리해 있다. 그는 쓰고 있다. '님께서 만드시는 영역과 그이가 만드는 영역 그 틈새에 신생이 있었습니다. 모두 그것이 있다고 꼭 믿었기에 두 분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래저래 살아갔습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여러 번 무릎을 쳤다. 그의 詩가 지니는 시의 임계속도(臨界速度)가 여기에서 발생한다. 우리로 하여금 '님'을 상면케 한다. 그의 시 '님 연작' 처처에 '님'께서 자리하고 계시다. 그의 시를 읽고 이미 개운해진 우리 몸과 마음의 실상이 님의 정체를 증거하고 있다. 그게 신생(新生)이다. -정진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