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안과 밖을 순례한 여정의 기록, 조정권 시인의 [떠도는 몸들]
(창작과비평사, 2005년 5월 14일)

조정권 시인이 [산정묘지] 이후 10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전작들에서 강인한 어조로 팽배한 물신주의를 거부했던 시인은, 이제 지상에 깃든 예술혼의 흔적을 찾아 여러 도시를 유랑한다. 사막 같은 세상살이를 견디는 쓸쓸한 비애감을 나직한 어조를 통해 드러내고, 인간 본래의 가난함을 향해 손을 내민다.

[떠도는 몸들]은 집착과 욕심을 버린 마음의 가난을 지상가치로 삼은 시인이 일상의 안과 밖을 순례하는 여정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볼프강 헤르만, 파울 첼란, G.트라클, 파가니니, 김수영, 박정만, 장욱진, 정찬승 등 시집 도처에서 출몰하는 예술가들은 세상과 불화하면서 한 점 빛을 남긴 이들의 이름이다.

자칫 현실도피적이고 관념적으로 비칠 수 있는 이 여정은 평온한 일상의 언어로 담담하게 서술하듯 형상화되어 있다. 일상의 남루함이 자연스레 시로 화하는 대목들과, 술.음악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 예민한 음악적 감성, 절제된 표현들도 돋보인다.

조정권 1949년 서울 출생. 197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시편], [산정묘지], [신성한 숲] 등이 있음. 녹원문학상, 한국시협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책 속에서

같이 살고 싶은 길

1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찬비 떨어지면 붉은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 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본 외길
땅에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늙그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가 걷다가 더 가지 않고 온 길이다


::시인의 말

조릿대 세(笹)와 눈 설(雪), 세설(笹雪)이 베란다 귀퉁이에서 4년 겨울을 났는데도 소식이 없다. 추운 곳을 좋아하고 더운 곳은 기피하며 제 몸안의 수분만으로도 삼년은 견디는 선인장속(屬) 다육식물이다. 말리듯이 길러야 하며 여느 식물처럼 물을 주다간 썩어버린다. 얼어죽을까 염려스러워 이곳저곳 옮기다간 여지없이 죽는다. 잘 길러보려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놈을 시처럼 대하며, 집착을 버리니 마음은 자유롭고 조급함도 버리니 몸이 가벼움을 배웠다.

시 쓰는 일이 그렇다. 어떤 간절함이 괴어 있다가 꽃대를 밀어올리는 일이 있지만 오랜 메마름이 게으름을 바깥으로 쫓아내는 일도 있다. 이번 시집이 그런 경우이다. 삶의 진정한 수척함은 ‘걸(乞)’ 속에 내포된 강골(强骨)과 청빙(聽氷)으로 뻗어가야 하나 내 언어들은 거기 닿기는커녕 멀리 떠돌기만 했다. 시집을 준비하던 연초 내내 거적뙈기 밑에 꺼져 있는 햇빛 같은 것을 들추고 있는 심정이었다.

10년 만에 내는 일곱 번째 시집이다. 제목을 『떠도는 몸들』로 삼았다. 변화나 진전도 없는 내가 껴입고 살았던 마음 살림살이의 가난한 꼴을 끄집어 보여주는 데 솔직하다고 생각하였다.

-조정권


::추천글

마음의 크기에 대해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위없이 드높고 바닥 깊으며 가없이 드넓은 것, 만물을 일시에 관통하고 온 우주를 품고 있으면서 늘 고요한 것, 그 마음과 우리 마음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 마음을 되찾으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떠도는 몸들>은 마음이 가난에 이르렀을 때 찾아오는 햇빛, 땅거미, 저녁비, 눈, 얼음 그리고 밤 같은 것들에 주목한다. 그것들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들이나 우리가 잊고 있거나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것들이다. 마음이 가난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최초의 인간들로 부활한다. 그렇다. 시인이란 최초의 인간, 세계에 대한 느낌이 펄펄 살아 있는 자들이다.

아주 감각적인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이후로 30여년, 그는 예리한 검을 숨긴 마음의 순례자와도 같이 드높은 영혼들을 우러르기도 하고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은 고절(孤節) 속으로 은둔하기도 하면서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한 길을 걸어왔다. 이 시집은 험난했던 그 길들을 되돌아본다. 위없이 드높은 것이 도(道)요 바닥 없이 깊은 것이 예술이며 가없이 드넓은 것이 가난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을볕 따스한 툇마루에서 잠시 쉬는 행자(行者)처럼. - 최승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