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만에 펴낸 작품집 전상국의 [온 생애의 한순간]
(문학과지성사, 2005년 4월 11일)

소설가 전상국이 <우상의 눈물> 이후 9년 만에 펴내는 작품집이다. 제27회 이상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한 '플라나리아'를 비롯하여 총 8편의 중.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나날이 비속해지는 일상과 경박해지는 언어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흐려져 가는 존재의 의미와 우울한 현대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았다.

수록된 작품들은 '실종'이라는 테마로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작가는 실종의 테마를 통해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존재 회복의 가능성을 성찰한다. 죽음을 포함한 실종들은 일상성이라는 삶의 질서를 반성하게 만들고, 그것에 길들여져 굳어지거나 이완된 의식을 깨운다.

표제작 '온 생애의 한순간'은 산행을 하다 서로 알게 된 두 남녀의 이야기. 작은 곤충들을 찍으러 다니는 여자와 건축 회사에 다니는 남자가 곤충 사진을 찍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하지만 여자의 곤충 사진이 세상에 알려지고 남자가 결혼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사이에는 점차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전상국 1940년 강원도 홍천 출생.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 수상. 작품집으로 [바람난 마을], [하늘 아래 그 자리], [아베의 가족], [외등], [형벌의 집], [온 생애의 한순간] 등이 있다.

::책 속에서

그가 미지에게 온 날 그는 사과꽃을 좋아하는 미지를 위해 사과나무 한 그루 심습니다. 구름이 바람에 흘러갑니다. 미지를 위해 심은 한 그루 사과나무 묘목이 처음으로 스물다섯 송이 꽃을 피우던 그해 미지는 터질 듯 볼이 붉은 열매로 열립니다.

그가 미지에게 온 날 천둥벼락이 치고 흙비가 내립니다. 흙비를 맞은 사과꽃은 더 이상 사과꽃이 아닙니다. 그가 미지에게 온 어느 봄날 밤 불임의 사과나무 가지에 하얀 보름달이 걸립니다. 없는 듯 있는 바람 한 점이 사과나무 가지를 흔듭니다. 바람의 희롱은을 피해 보름달이 슬쩍 구름 뒤로 숨습니다.
- 본문 131쪽 '이미지로 간다' 중에서


::작가의 말

9년만에 묶어내는 중.단편집이다. 원래 과작 체질이기도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탐한 탓이다. 갈피도 잡을 수 없는 일에 열정을 쏟아내다 문득 돌아보았을 때 거기 어디에도 내가 없었다. 허망. 그럴 때 구원처럼 글쓰기에 매달리곤 했지만 무뎌진 감각 되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대로의 자위는 두꺼운 외투를 벗어버리고 가뿐한 차림으로 나서고 싶은 충동의 수용이다. 시류와의 타협이 아니라 가둬뒀던 물이 넘쳐 새로이 길 하나를 만드는 즐거움. '6.25적 악령' 또는 성공하지 못한 악의 한 유형인 '사이코'의 광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매듭짓기, <온 생애의 한순간>을 묶어내는 일로 내 문학의 집에 이르는 작은 이정표 하나라도 보였으면 좋겠다. - 전상국


::추천글

이렇게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그것을 충만하게 만드는 창조와 신생의 언어에 대한 전상국의 추구에 대해 우리는 언어의 심미화와 윤리화의 의지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언어로부터 일상의 때를 지우고 의미의 얼룩을 닦아내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 보이도록 만드는 투명한 언어, 국이 다른 말로 하자면 e'criture에 대응하는 언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를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순간부터 억압되고 은폐되어온 이 잃어버린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 일상성의 어두운 벽에 갇힌 우리의 존재의 본질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전상국은 일깨우고 있는 것이리라. - 권오룡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