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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설] 이별
이름 유중원 이메일



이별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모래폭풍은 진즉 멎었다. 하늘은 눈부시게 맑고 푸르렀다. 모래언덕의 풍경은 참으로 낯설고 생생한 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가운데 안간힘을 다하여 사람의 흔적을 찾아 근처 높은 모래언덕에 올라가서 사방을 멀리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곳엔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풀 한 포기, 바짝 마른 나무 한 그루까지. 멀지 않은 곳에서 낙타의 하얀 마른 뼈들만 보였다. 두개골, 목뼈, 척추뼈, 갈비뼈, 넓적다리뼈, 종아리뼈 등이 보였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뿐이었다. 김규현은 지금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막의 미로 한가운데 갇혀버린 것이다. 그 미로는 광활한 사막에서 끝없이 뒤엉키며 풀어지고, 은밀하고 끝이 없는 원들을 만들면서 무한정 증식되었다.

이제, 사막은 그에게 현기증을 불러 일으켰고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무거운 침묵. 서글픈 고독. 모래언덕에서 내려다 본 악마의 사막은 막막했고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오직 사막의 태양만이 그를 금방 태워버릴 듯이 머리 위에서 무섭게 이글거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뜨겁게 달궈진 모래더미 속으로 발이 푹푹 빠져 들면서, 사막의 열기가 온몸을 태울 듯이 휘감아 덮쳤다. 더 이상 한 걸음이라도 옮길 수가 없었다.

뜨거운 열기로 온통 얼굴이 달아오르고 피부는 불에 타버린 것처럼 아팠던 것이다. 그는 그런 혹독한 고통 때문에 메마른 입술이 모두 갈라졌고 입을 간신히 벌린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혓바닥은 완전히 바싹 말라 붙어버려서 말 한마디 하기조차 어려웠다. 그의 티셔츠는 땀에 절어 소금기로 허옇게 얼룩져 있었다.

굶주림과 갈증, 혼란이 기다리고 있는 트럭 아래 그늘로 다시 기어들어간 그는 모래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에서 그는 자꾸만 혼미해지는 정신과 치열하게 싸웠다. 희망은 멀리 사라졌고 불안과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죽음의 전율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죽음의 공포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다시 밤이다. 사막에 어둠이 내리면서 모래바람이 가볍게 회오리를 일으키며 대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소릴 들을 수 있다. 초저녁 밤하늘에는 어느새 쏟아져 흘러내릴 만큼 무수한 별들이 반짝인다. 밤이 깊으면 금실과 은실의 은하수로 수놓은 하늘에는 노란색인 레몬빛 별들도 있고, 핑크빛이나 초록빛 혹은 파란빛이나 물망초빛을 띠는 별들이 저마다 빛나고 있었다.

 

그녀, 손희승의 얼굴 윤곽이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 대한 기억은 비현실적일 만큼 먼 곳에 가 있었고 흐릿할 뿐이다. 그는 그녀를 그렇게 까마득히 잊고 지낸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존재해 본 적이 없는 존재, 아니면 오직 꿈결 속에서만 존재하였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가 꿈을 꾼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하였으나 그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게 가물가물하였다. 다만 그 술집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만 안개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행복한 느낌이 여태껏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그 여자를 한때 사랑했었던가, 하지만 사랑할 이유가 있긴 있었나? 그 이유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군.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자신을 심각하게 기만하는 짓이었다. 그런데, 사랑이 먼저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그 이유는 나중에서야 따라오는 거겠지. 자신을 속일 필요는 없을 거야. 그녀와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었으니까. 그때는 내가 그녀를 배반했고, 그녀가 나를 배반했지. 그런데, 그건 그거지. 서로 빚진 것은 없는 셈이야.’

그녀의 두 눈은 그때 눈물이 가득 고여서 어두운 불빛 속에서도 반짝거렸다. 그녀의 살 냄새가 지금도 그를 자극했고 전율케 하였다. 그 향기가 여전히 기억났다. 감미롭고 찌르는 듯한 그 향기가 코끝에 느껴졌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헝클어져 뒤엉킨 채 모래가 서걱거리는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쓰다듬는 것 같았다. 그녀의 긴 두 팔이 그를 꼭 껴안고, 두 다리가 그의 다리에 가벼운 압박을 가하면서 얽혀 들었고, 가볍고 밋밋한 가슴이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멜로디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그의 귓전을 스쳤다. 그녀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겁고 검붉은 피가 그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가늘고 유연한 그녀의 몸이 어린 아이처럼 보였다. 그녀가 부드러운 모래를 끼얹으며 터트리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모래가 어깨와 가슴 위로 미끄러지고, 길고 부드럽고 탐스런 새까만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서 어깨 너머로 흘러 내렸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일이란 지금쯤 마음속에서 그저 단념하기만 하면 그걸로 무난한 결말이 될 터이다.

‘그래, 단념해야만 할 거야. 손희승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때 술집에서 진실을 깨달았으니까. 사랑의 진실을……. 사랑의 고통을……. 그건 피상적인 것은 아니었어. 마술적인 환상도 아니었어. 빛나는 영감도, 사춘기의 열병과도 같은 열정도 아니었지. 어머니, 동생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남쪽 바다에 대한 짙은 향수, 추억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지. 심연처럼 너무나 깊은 거였지. 그러나 난 그걸로 만족하지. 그녀의 초조한 눈빛이 너무나 절실하게 말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나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끝나버렸거든. 우린 다시 만나도 서로 약간 서먹하고 낯설 거야.’

 

그녀는 말하자면 회사 내에서 전속 사진사의 역할을 하였다. 공사현장에서 여러 가지 각도로 세밀한 사진을 찍어 담당 부서에 넘기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진촬영은 엄숙하고, 전문적이고, 따분한 것이어서 그녀에게 그렇게 재미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자금이 축적되면 자신만의 작업실을 마련하여 프리랜서 사진기자 또는 사진작가가 되는 것이 일생일대의 꿈이었다. 그래서 저명한 사진 전문 잡지에 특집이 실리고, 세계 각국의 유명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사진작품 전시회가 열리며, 제대로 값을 받고 사진을 팔기 원했다. 궁극적인 꿈은 국제적인 사진 전문 출판사에서 멋진 제목을 붙인 사진집을 내는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생생한 현장사진을 찍기 위하여 빛과 노출, 사진의 구성, 초점, 심도의 조절, 여백, 셔터 속도 등과 지루한 씨름을 하였다. 다양한 각도와 미묘하게 변하는 빛의 질과 방향, 색조 속에서 결정적인 순간, 찰나에 불과한 순간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피사체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 계속적으로 노려보다가 그 순간이 오면 연거푸 셔터를 눌러야 하였다. 그녀는 찰나에 불과한 그 눈 깜짝할 순간에 대상의 영혼과 내면 또는 정수를 포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그녀의 렌즈는 피사체의 영혼을 빨아들여야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은 피사체를 렌즈로 포착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완전하게 어두운 암실에서 필름 현상과 인화라는 힘들고 복잡한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사진의 명암을 구현하기 위해서 빛과 시간을 직접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수많은 시간을 암실에서 보냈다. 그 지독한 약품 냄새를 맡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날로그였다. 그 흔해빠진 디지털 카메라는 한 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촬영부터 시작해서 인화까지 그녀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과정이 소중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귀찮은 점이 많았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알았다.

그녀의 흑백사진은 꿈속에서처럼 희미하게 투사된 것 같기도 하고, 피사체가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비밀을 꿰뚫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시적인 감정이입을 위하여 흑백의 농담에 집착하였다. 슈베르트의 음악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깊고 단단하고 순수한 흑백사진은 피사체의 내면에서 풍기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그 사진에는 그녀의 사진작가적 상상력과 망상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사진은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들여 강렬한 느낌을 전달하였다. 그 느낌이란 기쁨, 슬픔, 연민, 증오일 수도 있었고,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한순간을 포착할 뿐만 아니라 피사체의 배경이 된 시공간을 압축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진 속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노력하였다. 모든 사진은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사진은 이 세상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과 본능적으로 교감한다. 그녀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삶의 현장과 공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가끔 렌즈에 남몰래 눈물이 가득 흐르는 일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사진작가로서 무언가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연한 강박관념 같은 것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사진 한 장이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다던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 그녀는 항상 마음이 홀가분하였다. 그녀는 사진작가들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35mm 카메라로 편안하게 사진을 찍었다.

 

손희승은 원래 세밀화가 지망생이었다.

그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종이, 스케치북, 빈 도화지, 노트, 섬세하게 깎은 가는 연필, 색연필, 물감, 재료들을, 그 냄새를 좋아했다. 그리고 자신의 여린 손이 선을 그리고 색을 칠할 때면 자신의 존재감을, 자유와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공책 같은 작은 공간에 먼저 주제를 선택하여 구도를 설계하고 수십 개, 수백 개의 선을 긋고 온갖 색을 섞어 칠하여 인물과 동물, 새들, 꽃과 형형색색의 잎사귀, 나무, 구름, 숲 등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 넣고 어떤 이야기를, 또는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시 한 편을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다. 중세의 세밀화, 무슬림의 세밀화 세계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서 세밀한 손놀림으로 그리는 초극세화의 세계가 얼마만큼의 집중력과 인내력을 시험하는지를, 그것은 손쉽고 화려한 일이 아니라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고된 작업임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도 예술가로서 세밀화 속에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이나 색깔, 소리가 들어있는 것인지, 자신에게 다른 곳을 바라보는 눈이 있는지, 스스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선택하는 용기가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솜씨는 그녀가 재주를 부릴수록 섬세함과는 거리가 멀게 점점 거칠어져 갔다.

그녀는 때때로 서럽게 울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때로는 답을 찾지 못해서. 마침내 그걸 포기하였다. 그리고 그 대신 르네상스 시대 회화처럼 원근과 입체감을 풍부히 표현할 수 있는 사진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녀는 반야심경의 색의 세계보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본질과 실체의 세계인 공의 세계, 수많은 구체적 형상은 모두 사라져서 추상으로 녹아 들어있는 무의 세계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세계는 어둠이 내리는 이른 저녁의 색, 희미한 뒷골목 가로등 밑에 우울한 시처럼 내려앉은 어둠의 색, 추운 겨울의 색, 가난하고 상처입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의 색, 시골 농부들의 색, 더러움, 먼지, 흙과 대지의 색, 깨지고 부서지고 낡아버린 모든 것들의 색, 타버리고 남은 잔해의 색, 구름과 안개와 연기의 색, 흑백사진의 반쯤 어두운 색, 꿈과 허무, 공허의 색인 회색이고 잿빛이었다.

인간의 슬픈 이야기가,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시 한 편이 어떻게 화려한 채색일 수 있는가. 그녀는 회색의 세계에 이끌리면서 채색의 세계에 이별을 고하였다. 그리고 흑백사진에 집착하였다.

 

김규현은 회사에서 업무 관계로 그녀와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고, 그녀가 셔터를 누를 때면 보여주는 침착함과 자신감, 돋보이는 감수성에 감탄하였다. 물론 예쁜 얼굴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군더더기 살 하나 없이 뼈대만 남은 것 같은 마른 몸에서 쏟아지는 직설적인 눈빛과 그녀의 내면에 담긴 아름다운 삶 자체의 비밀에 끌린 것도 사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를 보면 그 어떤 알 수 없는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고, 감미로운 여운 때문에 오랫동안 황홀하였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이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만약 사랑이라고 해도 그것은 완전히 일방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그녀는 늘 소매가 넓은 옷을 입어 편안해 보인다. 그녀의 옷은 환상을 원단으로 재단해서 몸에 걸친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갓난아이 시절 어머니의 젖가슴과 얼굴에서 맡았던 잃어버린 냄새들, 낯익고, 기분 좋은 냄새를 다시 맡을 수 있어 좋았다.

그렇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무실을 오가면서 또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교환한 후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힐끔 훔쳐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너무 빼빼 마른 것은 좋지 않아. 뼈에 살이 붙은 게 보기 좋은 거지. 하지만 고래 힘줄처럼 고집이 세서 질질 짜는 스타일은 아닌 거야. (그들은 소속 부서가 달랐다. 그래서 그녀를 보고 계통이나 결제 라인에서 만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까 가끔 마주칠 일조차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희미한 모습이 망령처럼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그의 가슴 속에서 몰아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건 헛수고였다. 그것은 끊임없이 환상을 충동질하였다. 그것은 어머니였고, 아내였고, 누이동생이었다. 손을 뻗쳐도 닿을 수 없는 금단의 열매였다.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모호하고 아득한 어머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녀는 존경받는 자이고 멸시받는 자이다. 그녀는 타락한 자이며 거룩한 자이다. 그녀는 아내이고 처녀이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딸이다…… 그녀는 지식이며 무지이다.)

사랑이란 눈을 통하여 흉벽으로 침입하는 독특한 괴질이다. 그는 그때마다 무서운 신경증을 앓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흘끗 몰래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 나를 쳐다보았는지도 궁금하였고, 언제 또다시 마주치게 될 것인지도 궁금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명백히 과장된,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수사적인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태어나서 난생 처음 느껴보는 그런 종류의 감정의 폭풍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과연 진짜 사랑의 감정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사랑의 감정이란 항상 다양하고 미묘한 것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는 방배동에서 1차로 어지간히 마셨지만 여전히 미진하여 마지막 입가심을 하기 위하여 혼자서 서초동 예술의 전당 부근의 지하 카페에 갔을 때 전혀 예기치 못한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벌써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어서 날짜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 같기도 했고, 어쩌면 한 달 전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고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술집에서 그녀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 역시 그와 마주치는 순간 흠칫 놀라고 몹시 멋쩍어 하였다. 그녀는 그때 심장이 마구마구 뛰어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전율이 그녀의 온몸을 관통했다. 그녀는 냉담해지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그를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그를 향하여 몸짓 하나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단 한순간에 그녀의 결심은 스르르 녹아버렸다.

그녀가 자신에게 타일렀다. ‘흥분해선 안 되는 거야. 정말 침착해야만 하지. 오늘은 술을 많이 마시면 안 되겠지. 이 바보야! 그와 단둘이만 있게 되었거든. 그의 관심을 끌고 사로잡아야만 하는 거야. 그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거지.’

달콤한 향수냄새가 술 냄새에 섞인 채 희미하게 풍겼다.

그때 여름은 지나갔으나 아직 완전한 가을은 아니었다. 9월 중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더위는 한풀 꺾였다. 숨이 턱턱 막혔던 더위는 사그라지고, 밤에는 제법 선선하였다. 여름의 태양이 기세를 잃으면서 낮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밤은 성숙하지 않았다. 텅 빈 술집은 도시의 소음이 차단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때 괜히 변명부터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동네 언니가 하는 집인데 언니 만나러 왔다가, 심심해서 한 잔 하고 있어요. 언니 혼자서 하는 술집이거든요. 언니는 늦게 온대요. 상무님은 저 같은 거 기억도 못하시죠.

전 상무님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 말이죠. 아름다운 사모님께서 지금 임신 중이라면서요.

신경이 너무 많이 쓰이시죠. 그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생겼을까요? 참으로 궁금하거든요. ……빼닮아서 이목구비와 그 표정이 아기의 얼굴에 살아 있을지?”

“…….”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구요, 다 알 수 있어요. 전 상무님 일이라면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있거든요.”

그녀는 많이 취하여 혼자 더듬거리고 있었다. 모처럼 만난 김에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 찬 말들은 갈피를 못 잡고 허공에 떠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형태의 조급함과 진지함이 함께 담겨져 있었다.

“저도 사막을 좋아한다구요. 얼마 전에 고비 사막에 다녀왔어요. 그러나, 사진은 단 한 장도 찍을 수가 없었어요.

대지에서 울리는 느낌이 너무 강렬했거든요! 또 별이 쏟아져 내리는 고비의 밤하늘은 어떻구요!

초인간적인 대지의 기운이 엄청난 힘으로 내 영혼을 빨아들여서 전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어요. 셔터 누를 힘조차 없었다구요.”

“……”

“참, 상무님은 여행 하시면서 절대 사진을 찍지 않는다죠. 귀찮아서, 아니면 사색에 방해가 되니까? 절, 이 세상 끝까지, 어디든지 데리고 가주세요. 제가 열심히 찍어 드릴게요.

그런 환상적인 순간을 놓치면 안 되겠죠. 지금 ‘날 데려가세요’ 하고 소릴 지르고 싶군요. 물론 어림없는 소리지만 말이죠. 가끔, 제가 보호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어쩔 줄 모르는 그 쓸쓸한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히거든요. 그땐 꼭 안아주고 싶어요.”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어서 조그만 술집이 휑한 느낌을 주었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그런 술집은 정말 쓸쓸하다. 술집의 어스름한 불빛 속에서 그녀의 불그스레한 얼굴이 묘한 매력을 풍겼고, 우뚝 선 콧날 위로 꿈처럼 모호한 슬픔이 무심히 스쳐갔다.

“전 이혼녀에요. 아주 일찍 결혼하고 일찍 이혼했어요. 회사에서는 누가 알까봐, 괜히 전전긍긍하고 있지만요.”

그녀는 끝내 비밀로 간직하려 했지만 그날 밤은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걸 하필 내게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그가 마지못해 우물거리듯 희미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글쎄요, 그래도, 상무님은 알아야 될 것 같거든요. 그동안 기회가 없었잖아요. 전 운명을 믿는 편이죠. 지금 운명의 냄새가 느껴져요. 전 상무님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제가 기다려왔던 사람이 바로 상무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리고…… 야릇한 운명을 한탄하였지요. 왜, 우린 아주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하구요. 아름다운 사모님보다 먼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

“우린 둘 다 멍청이 아닌가요?”

“바보는 바로 나겠지.”

그 말을 하는 짧은 순간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둘만의 좁은 공간에서 마주쳤다. 그녀의 달착지근한 숨결이 그의 코끝을 간질이며 얼굴에 달라붙었고, 검고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이 귓가에서 서걱거렸다. 그녀의 긴 목이 육감적이었다.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가 빛났다. 구리 반지를 낀 가는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미모사보다 더 예민한 그녀의 눈에 가녀린 이슬 같은 눈물이 어렸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 때문에 목이 메려 하였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술 한 잔을 꿀꺽 삼키고, 그를 향해 억지로 미소,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약간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려는 듯 그녀가 술을, 소주와 맥주, 양주 등을 스스로 꺼내왔다.

“그래요, 나도 소맥 잘 마신다구요.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냐…… 나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요. 취하고 싶네요. 지금보다도 열 배는 더 취하고 싶네요. 당신은 날…… 이혼녀가 너무 따분한 나머지 머릿속이 온통 섹시한 남자 생각으로 가득 찬 한심한 여자로 보고 있으니까, 사람을 너무 무시하니까,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지.”

술은 느지막한 밤에 마셔야만 제격이다. 희미하고 가느다란 불빛 아래서 얼큰하게 마셔야 술맛이 제대로 나는 법이다. 어둠침침한 작은 술집이 더없이 아늑하였다. 두 사람의 술잔이 허공에서 제멋대로 도형을 그리며 은밀하게 또는 무분별하게 서로 부딪쳤다. 그녀는 더욱 취하였고, 한층 불그스레한 얼굴에 혀가 더욱 꼬부라졌고, 더욱 달콤한 목소리로 말을 많이 하였다.

술의 마술적인 효과에 의해 그녀의 굳었던 혀가 완전히 풀렸다. 그녀가 제멋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김 상무, 당신 말이야,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무언지 알아요? 그게 술 아니겠어요!”

“그렇지, 인간이 술을 만드니까 그 술이 사람을 호모사피엔스 알쿨리크스 를 만들었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술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그래서 술꾼은 술의 노예가 되지. 그러면 술은 그 노예에게 가차 없이 주인 노릇을 하지.”

“그만 둬요.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저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지금, 술을 많이 마시니까 두려움이 싹 사라지네요…….”

“…….”

“전, 당신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했죠. 말을 걸어올까봐 말이에요. 내게 말을 걸어오면 머릿속이 마구 뒤엉키면서 말을 더듬을까봐 겁이 났지요.”

“…….”

“당신 앞에 서면 멍청해질까봐 무서웠던 거예요…….”

“…….”

“당신, 내 기분이 어떤지 아세요. 날 지금 속으로 비웃고 있죠.”

“그럴 리가 있나.”

“지금 아니어도 나중에라도 틀림없이 비웃을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너무 취했어.”

“그런데, 당신은 모든 것에서 완벽주의자 아녜요? 한번 프로젝트의 설계 작업을 맡게 되면 미친 듯이 몰두하니까요. 당신은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불안증이겠지요. 그것도 아주 심하게 중증이지요.”

“착각은 하지 마, 완벽은 없어, 불가능해. 사람도 세상만사도 불완전하고, 미성숙하고, 미완의 것이지. 완벽에 집착하는 것은 미친 짓이지.

만약인데 말이야,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완벽하다고 인정해도 그런 건 인간의 미망이 초래한 일종의 위장이거나 함정일 거야. 완벽 또는 완전이란 것은 성숙했다는 뜻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거지. 그걸 오해하면 안 되겠지.

그렇다면, 결국 완벽주의는 과대망상인 거지. 다시 말하지만 완벽이란 참으로 비인간적인 거야. 그건 광신자에게나 해당하는 것이겠지. 그러므로 유일한 완벽은 죽음을 의미하는 거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완벽이 아니라 완성인 거야. 우리는 완벽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지. 그러나 완성을 위해서는 설계도 앞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생명력을 불사르기 위해 반쯤 미쳐야만 하는 거지.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아 또다시 실망하게 되고. 그때는 너무 지쳐서 작업을 멈춘 채로 티자 자 하나 들 수 없는 무기력한 마비 상태에 빠져들고 말지. 그러니까 에밀 졸라의 클로드 랑티에처럼 목을 매고 죽어야만 하는 거야.

가령 내가 완벽하다면 유행에 아주 민감했겠지. 그래야만 되니까……. 요즘 고층 빌딩이 한창 유행하고 있지. 그러나 나는 회의적이지. 고층 건물은 아니야. 초고층 건물은 햇빛이 가득해야 할 거리에 긴 그림자를 오만하게 드리우며 하늘을 가리지.

그러니까 건물의 외관은 비인간적으로 차갑고 냉소적으로 느껴지는 거야. 절대로…… 절대로 아닌 거지. 그건 바벨탑의 교훈을 잊어버린 탓이지.

그리고 건축학적으로도 초고층 건물은 콘크리트 변형에 따른 기둥 축소 현상을 해결할 수 없거든. 지진에도 취약하고. 그래서 고층 건물은 결국 바벨탑의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는 거지. 인간들이 점점 오만해지고 있거든. 인간과 건축의 본질을 망각한 짓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나는 유행에 뒤떨어져서 소외되고 있는 거야. 소외되고 있다고…….

나는 위대한 건축가가 되길 바랐지만……. 그러나 이름이 아닌 건축 작품이 남겨지길 원하였지. 그게 이루어질지 모르겠군.”

“그런 복잡한 소린 듣고 싶지 않아요. 건축 얘기는 회사에서도 지겹게 듣거든요. 당신은 술집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소릴 잘 하죠! 왜 그리 눈치가 없어요? 좀 간단히 말할 수 없어요.

오직…… 당신이란 사람이 문제인 거예요. 당신은 도대체 믿을 수 없으니까요. 여자가 조금만 가까이 다가서도 멀리, 아주 멀리 도망가는 사람이죠. 여자가 스스로 옷을 벗을까봐 죽을 맛인거죠? 안 그래요?

당신은 겁쟁이이고…… 비겁한 사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녀가 너무 취해서 마구 지껄였다. 그러나 틀린 말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대충은…… 맞는 말을 하고 있군. 난 정신이 온전할 때는 얘길 잘 하지 못 하지. 혀가 풀리지 않거든. 하여간에 그래……. 술에 충분히 취하여만 혀가 그럭저럭 돌아가지. 그러니깐, 얘기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술이지. 소주가, 소폭이 하는 거지.”

그는 그녀 머리카락의 흔들리는 검은 빛깔에서 탐스러움을 느꼈다. 그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격렬한 욕망이 그를 덮쳤다. 그것 때문에 그의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하였다. 그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진 것 같다. 남자의 야릇한 육체적 욕망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저녁 마침내 이 여자의 몇 겹 신비한 베일을 벗겨버려야만 하지. 반드시……. 이 여자는 그 동안 다가갈 수 없는 경계선 밖에 있었지. 결국 여자의 몸뚱아리이겠지만. 이 여잔 여자이지. 여자로서 기능하는 여자. 지금 먼저 예행연습처럼 짧게 입맞춤을 한다면 어떨까? 옷을 벗기려들면 어떻게 나올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무슨 의미 없는 말을 지껄일지도……. 오직 거칠게 비릿한 신음 소리만 내뱉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가 여자의 옷을 벗길 줄 알았던가? 능란한 솜씨로 원피스의 뒤쪽 단추를 풀 수 있을까? (내가 상상 속에서 그녀의 옷을 벗겼던 적이 있었던가. 내가 꿈을 꾼 적이 혹은 환상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그녀를 성적 노예로 삼아 학대한 꿈이거나 몹시 반항하는 그녀에게 올라타 짓누르는 짓궂은 환상 말이다.) 하지만 결국 그 자존심이 강한 여잔 내가 그렇게 간청하는데도 불구하고 못하겠다고…… 지금은 당장은 안 된다고…… 이렇게 빨리 하면 자신을 천박한 여자로 볼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벌거숭이가 되면 우습게 보일 거예요!’ ‘그리고 말이에요. 갓난아기가 엄마 젖을 빨듯이 당신이 내 젖꼭지를 넣고 우물거리면 간지러울 거예요.’ ‘틀림없지요. 당신의 절망적인 움직임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몸부림치는 동작을…… 영혼이 달아나버린 맥 빠진 육체의 기계적인 동작을 보는 것은 끔찍할 거예요’ 라고 말하겠지. 그러니, 시간이 지나가야 한다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고 하겠지.’

그는 그때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모호하고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육체가 서로 엉키고 밀착해서 한 몸이 되고 싶었다. ‘내가 그녀를 강간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그녀를 강간하고 싶다. 그녀를 짓밟기 위해 거친 폭력을 행사하고 싶다. 그녀의 자존심과 열망, 불안,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단번에 그녀를 집어 삼키고 싶다.’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는 그 순간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어리석고, 추악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거침없이 꿈틀거리는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달콤한 술기운이 일시적 통증 같은 그 욕망을 가라앉혔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애무하고 싶은 성적 쾌락에 대한 갈증을 가까스로 억제하였다. 곧 그 아름답고 신비한 인간적 본능은 어둠의 망각 속으로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욕망이 사그라지면서 모든 것이 시시하고 공허해 보였다.

그는 울고 싶었다.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무언가 은밀한 일이 들통나서 무안한 기분이 되었고, 그녀를 다시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눈길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말의 실마리를 잃어버렸다. 그는 억지로, 그녀에게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분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는 다급하게 소맥과 강한 술을 닥치는 대로 계속 마시기 시작했고, 독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마치 불덩이를 삼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강렬한 술기운이 부끄러움처럼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 술집에는 그녀만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상당히 취한 상태에서 언니가 돌아오자마자 고독한 환상의 섬인 그 술집으로부터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그 추상적인 섬은 그 무렵 그의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의 가슴 속을 이리저리 떠다녔다.

두 사람은 이제 결코 서로 만나지 못하리라.

 

그 후 손희승을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그녀가 곧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한참 나중에서야 그녀가 새로 창간한 패션 전문 잡지의 사진기자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1998년 늦은 봄. 토요일 석양 무렵.

황혼의 빛깔은 마치 무지개를 층층이 쌓아 놓은 것처럼 불타는 분홍, 장밋빛 분홍, 짙은 회색 분홍으로 변하고 있었다. 세상의 풍경이 황금빛 석양에 물들고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하늘을 쳐다본다. 시뻘건 해가 석양 저편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그는 그때 서초동 남부터미널 부근에서 방배동 쪽으로 아주 느릿느릿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는 리비아로 가는 출국 준비가 거의 끝나서 홀가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6월 초순경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는 그녀와 길에서 갑자기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깜짝 놀란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죄송해요. 얼마 전에 회사를 옮겼지요. 말씀드릴 기회가……. 건축 쪽 현장 사진은 어지간히 찍었거든요.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었지요. 자세한 이야기도 없이… … 그냥 그랬어요.”

두 사람은 짧은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면서…… 잠시 환한 미소에 잠긴다. 서로 반가워서 손을 잡을 듯 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주춤거렸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녀에게 심술이 나서 빈정대고 싶었지만 꽉 막혀버린 목구멍에서 말이 잘 흘러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가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골목길로 꺾어지는 모퉁이에 너무 빨리 도달했다. 거기서 잠깐 멈추었고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려고 하였지만 눈물이 글썽거려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뒷골목 길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압도적인 힘으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영영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었어. 난 당신을 붙잡을 수 없었던 거지. 그럴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해줘. 날 내버려둬.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녀가 그때 했던 말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참된 사랑은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줄 알죠.”

사소한 작별 뒤에는 영원한 이별이 뒤따른다.

 

 

에필로그

손희승은 잡지사에서 사진기자로 몇 년 간 근무한 후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서 유수한 일간지의 사진기자로, 말하자면 스카우트되었다. 그때가 김규현이 죽기 전 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김 상무가 사하라에서 죽은 사실을 세 달쯤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해 (2000년) 늦가을이었는데 난생 처음이라고 할 만큼 술을 많이 마셨고 (거의 매일 밤 폭음을 했고, 만취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십팔번.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를 바리고 가시리잇고……) 그리고 밤마다 울기도 많이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모든 걸 잊기 위해서 몇 년 동안 신문사 일과 사진 작업에 몰두했다. 그 무렵 그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보다 다섯 살 아래인 문화부 기자 녀석이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그녀의 과거지사는 상관없다고 에둘러서 문자 메시지 또는 이메일을 뻔질나게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철저히 무시했고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기자들 몇 명이 모여서 옛날 피맛골 골목에서 2차, 3차 단골집 순회를 하였고 마지막 술집에서 그 기자가 공개적으로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하니깐 결혼하자고 구혼을 했던 것이다. 그때 그녀는 그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리고는 내뱉었다. ‘씨발 새끼 같으니라고.’ 술판은 그 일로 파장이 되었고 그 소식은 사진부와 문화부를 걸쳐서 사내에 은밀하게 퍼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그 몇 달 후 그녀는 상사에게 분쟁의 현장, 전쟁터에서 인간의 실존 상황을 취재하고 카메라에 담아야한다고 고집하며 아프카니스탄에 파견을 요청하였고, 부장은 너무 위험하다고 진심으로 그녀를 위하는 마음에서 아프가니스탄 행을 극구 말렸다.

그녀가 말했다.

“퓰리처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여성 사진작가 캐럴 구지가 ‘사진기자란 목숨을 걸고 오지로 떠나는 선교사와 같다’고 말했지요. 때로는 천 마디 말보다 사진 한 장이 위대할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있는 세계의 지붕에 고립된 채로 살아가는 유목민인 키르기스족의 삶의 모습, 아름다운 양귀비 밭과 아편에 중독된 사람들, 용감한 탈레반 전사들을 사진에 담고 싶습니다.

그리고 총탄이 날아다니는 현장으로 가고 싶지요. 생생한 현장으로 말입니다. 그들이 총을 쏘는 순간 셔터를 눌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기억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나를 사로잡겠지요.”

부장이 말했다.

“거긴 여자를 보내기엔 너무 위험해. 탈레반이건 민병대건 모두 위험하거든. 무지막지하다고 해야겠지. 그 쪽 사진은 AP나 UPI같은 세계적인 통신사들이 모두 이미 찍어버렸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도 몇 번이나 훑어버렸고. 그러니까, 특종감이 남아 있지 않은 거야, 알겠지?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부지하고 결혼도 해야 될 것 아냐.”

“프리랜서 기자로 용감하였던 부장님이 그런 말씀을 할 줄은 몰랐네요. 제가 여자라서 그런가요? 결혼이 무슨 상관이에요?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날 밤, 제가 그 사람에게 소리 없이 울부짖었지요. 지금 내 안으로 들어오세요. 어서…… 빨리……. 내 몸은 당신의 아늑한 집이 될 거에요. 내 자궁은 당신을 지키는 성벽이라고요.

저는 그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계속 우울과 불안 증세에 시달렸지요.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죽고 싶다는 충동이 들더군요. 의사가 항우울증 약을 처방해주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지요. 지금이라도 그 쪽으로 멀리 가는 게 나아요.”

“그러나 안 될 일이야. 그 사람 일은 내가 알 바 아니야. 그러니까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들의 운명을 알고 있기나 해? 그들은 자유로움을 선택한 대신 비정규직보다 못한 대우를 감수해야만 하는 거야. 늘 돈과 신분 문제로 고민하게 되지.

메이저 언론사들도 분쟁지역의 기사를 원하지만 사고 가능성 때문에 기자를 분쟁지역에 파견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거야. 내가 윗사람한테 네 이야기를 했지만 거절당했지. 곤란하다는 거야. 참혹한 현장 취재는 정신적 부담과 함께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하게 되거든.

내가 말이야, 이라크 전쟁에 갔다가 공황장애, 우울증과 불면증으로 한동안 고생했었지. 전장에 갔다 온 기자들은 그 후유증으로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안고 산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지만 현장에 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가 없지요. 그 시간이 아니면 기록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승자와 강대국의 시각이 아닌 우리 시각이 필요하지요. 사진 한 장으로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말이지요.

저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최전선으로 가고 싶군요.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내 책임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누구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게 저널리스트의 숙명 아니겠습니까.”

그때, 그녀는 머리를 짧게 깎은 후 프리랜서를 선언하며 사표를 내던졌다. 아무도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에 있는 바다흐샨 지역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최북단으로 타지키스탄과 파키스탄, 중국 등과 국경이 닿아 있었고, 힌두쿠시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 사이 파미르강과 와칸강, 아커쑤강, 아무다리야강이 흐르는 와칸 회랑의 높고 척박한 계곡에는 여자들이 붉은 옷을 입고,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인 키르기스족 사람들이 외부 세계와는 철저히 고립된 채로 장모종 염소나 지방꼬리양, 야크, 쌍봉 낙타를 기르며 그 젖과 고기를 먹고, 그것을 밀가루와 교환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곡은 마약거래의 은밀한 루트이다. 바다흐샨은 세계 최대의 양귀비 재배지로 한때는 전 세계 아편의 80퍼센트를 생산하였다. 농민들은 양귀비를 재배하여 생아편 덩어리를 만든 다음 탈레반이 지원하는 마약 밀수업자들과 거래하고 있었다. 탈레반은 아편 밀거래로 자금을 마련하고 서방 세계의 군대와 싸우고 있다.

그러나 그곳 농민들은 아편 중독이 만연해 있었다. 의료시설이 없는 벽지 마을에서는 아편을 약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가족 모두가 심지어 마을의 쥐나 뱀까지 중독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편의 씨앗은 식용유 원료로, 줄기는 땔감으로 사용하고, 타다남은 재로 비누를 만든다. 그들은 양귀비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얻는다.

그녀는 소도시인 바라하크에서 그곳 기준으로 중산층 가정에 둥지를 틀고 주인 내외의 15살 아들은 안내인으로, 17살 딸은 조수로 삼아 취재 활동을 하였다. 그 지역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는 조수와 안내인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 덕분에 기자들은 제대로 취재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폭탄 테러, 납치와 살해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들은 기자들이 방문해도 되는 곳과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지역, 주민들의 성향, 탈레반이 잠복해 있는 곳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던 것이다.

2007년 늦은 봄 (아름다운 분홍색 양귀비 꽃들이 알알이 열매를 맺는 양귀비 수확 철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사진기를 들고 국제안보지원군(ISAF)과 탈레반이 교전을 벌이고 있는, 화려한 색으로 불타는 듯한 사막지대인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생생한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그건 사진기자의 숙명이었다.

그녀의 조수, 비비 조하라가 말렸다.

“거기는 가지마세요. 그렇게 가까이 가면 안돼요. 조심하세요. 조심……”

탈레반이 설치한 사제 폭탄이 터지는 것을 신호로 옥수수 밭 뒤쪽 경사진 둔덕에 있는 두꺼운 토담 위에서 총알이 쏟아지고 격렬한 응사 사격이 시작됐다.

그녀는 입이 바싹바싹 말랐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손바닥에 땀이 고이고 손이 떨려서 셔터를 누를 수조차 없다.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눈을 질끈 감고 누르고, 누르고, 또 눌렀다. 찰칵, 찰칵, 찰칵. 그 소리들이 무심하게 저 멀리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그녀는 탈레반이 쏜 것인지, ISAF 쪽에서 쏜 것인지, 알 수 없는 총알을 가슴에 맞고 그날 현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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