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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에세이] (변호사가) 웬 소설을……?
이름 유중원 이메일



(변호사가) 웬 소설을……?

 

 

꾸준히 글을 써라!

절대 항복하지 말고!

— 카프카

 

 

원로라는 말은 어떤 업에 오래 종사하여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을 일컫지만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자칭 원로가 득세하였던가. 그 고리타분한 단어가 풍기는 역겨운 여운 때문에 나는 그걸 질색한다. 당연히 나는 원로 변호사가 아니다. 내가 무슨 경험과 공로가 많은 변호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군대식으로 자칭 고참 변호사라해도 별 무리는 없으리라.

법조인 경력 근 30년에 얼마나 많은 소장과 준비서면, 기타 법률문서를 작성, 제출하였는가. 그런데 소장과 준비서면은 그 독자가 우선적으로 판사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는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그것들을 정성스레 작성해서 법원에 제출한다. 그들이 과연 우리들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만큼 정성들여 읽기나 할까? 쓰기보다는 읽기가 훨씬 쉬운 일인데 말이다.

나는 폼 잡고 법대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의 표정과 몸짓, 언행, 숨소리에서조차 그가 준비서면을 읽지도 않았고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런 판사일수록 더욱 거들먹거리니. 나는 온몸에서 기운이 쏙 빠져버린다. 그때부터 나는 법정이 몹시 낯설어 지면서 일종의 공포감을 느낀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판결문을 받아보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음을 알게 된다. 그 판결문을 쓴 판사 역시 자신의 판결은 믿지 않을 테니까. 더욱이 그들은 사회경험도 없으면서, 전문지식도 결여되어있으면서, 이상한 편견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러나 이때 냉정하게 말하자면 승소 판결을 선고한 판사에게는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글쎄, 변호사들은 각자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지금 나는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며) 껍데기와 알맹이를 구분하는 단순화, 이분법적 경향에 영향을 받아 ‘우리’와 ‘그들’로 영역을 나누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다.

왜?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 하는가. 그들은 막강한 사법 권력을 배경으로 유권해석을 한다. 그들이 판결한다. 그들이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쯤해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 그들은 가끔 자신이 전지전능한 것처럼 착각할까, 그렇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아니면, 한번쯤, 가감 없이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고 ‘신이시여, 신이 계시다면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소서, 지금 죽고 싶나이다.’라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을까.

그들 역시 매우 하찮은 보통 인간이다. 우리 모두는 한낱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아닌가. 그러니 만날 허구한 날 기록을 읽는데 얼마나 지쳤을 것인가. 얼마나 지겨울 것인가. 그래서 직업적 매너리즘에 빠져서 설렁설렁 눈대중으로 대충 읽고 대충 판단하지 않을 것인가.

판결을 내리는 인간.

그러나 (모든 글에는 대게 ‘그러나’가 들어있다.), 그들은 겸손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휘두를 줄을 모른다. 그들이 자기 직업을 언제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언제 자신에게 의혹을 품어본 일이 있었던가? 한번쯤 법대에 앉아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긴장감 때문에 셔츠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은 경험이 있었던가? 그들은 언제, 가끔 악몽을 꾸는 일이 있었던가? 그 악몽 때문에 불면하는 밤은?

그들은 무대 위에서 지그재그 춤을 추는 광대들이다. 그들의 폐쇄적 획일주의는 불협화적인 다성음의 세계에 결코 적응할 수 없다. 자폐적이어서 세상과 소통은 불가능하고 세상과는 불화한다.

종결자로서 갖게 되는 오만한 권위의식. 과대망상증 환자. 완고한 관료주의 피해자 혹은 수혜자.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라는 위대한 관습의 신봉자.

나는 법복을 입고 높은 법대에 앉아있는 거야. 지금 법복의 무게를 느끼고 있지. 너희들은 우러러보고 있겠지. 그렇지 뭐! 알게 뭐야! 내 일도 아닌데!

당연히 그 중에는 기록을 꼼꼼하게 읽고 고뇌하면서까지 판단하는 판사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사물의 무게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 고심한다.

결론인즉, 나는 그런 서면을 작성하는데 지쳤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그런 판사들에게 재판을 받는 일도 우스웠고, 우울한 현실이다. 물론 그들 탓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사법제도의 모순 때문인가, 아니면 결국 인간의 문제인가? (플라톤이 벌써 2천 5백 년 전에 말했다. ‘판사는 젊은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판사는 자기 자신의 사악성 때문에 악을 저절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악성을 만년까지 오래 관찰함으로써 악을 알게 된 사람이어야 한다.’)

법조인으로서 지난 30여 년간은 진실과 허위, 법정에서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똑같은 말들의 반복 (그 닳고 닳은 말들 속에 언어의 간결함과 아름다움, 침묵의 언어, 언어의 정수인 은유는 없으니, 나는 관습적으로 ‘관대하게 처벌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변론하면서도 그 공허한 말을 경멸하고 증오했다.), 관료주의와 매너리즘, 자기기만, 궁상스럽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자기연민과의 기나긴 싸움이고 패배의 시간이었다.

나는 사물과 현상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가차 없이 무위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지금 무능한 변호사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그 중과부적의 일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단절 또는 절단이 필요하다. 나의 완전히 벌거벗은 영혼이 그걸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동안 변호사 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말이다.

그리고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내 손을 바라보며 시간이 없다고 절실하게 느낀다.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은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으니. 나의 방언으로 내 글을 써야한다는 갈망. 강박관념. 그걸 잠재워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나이에 원로 변호사 또는 원숙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원로 혹은 원숙이라는 느글느글한 단어는 교할이나 노회老獪라는 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여전히 미성숙한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

 

동물농장1984를 쓴 에릭 블레어는 작가가 소설을 쓰는 네 가지 동기를 열거하였다.

첫째. 순전한 이기심.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 보복하고 싶은 욕망. 그게 작가의 동기, 그것도 강한 동기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둘째. 역사적 충동.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발견하여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기록해 두려는 욕망. 셋째. 정치적 목적.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넷째. 미학적 열정. 이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언어의 아름다움과 단어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그러나 나는 위 네 가지 동기 또는 욕망 중에서 순전한 이기심이나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은 가지고 있지 않다. 단언할 수 있다. 특히, 나는 정치적인 것, 추상적인 이념, 주의 같은 것은 잘 알지도 못하고, 역사의식도 사회의식도 희박하니 그 운동에도 무관심한 편이다. 나는 이데올로그, 사회 변혁가, 운동권,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여문학이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같은 것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오직 지금 / 여기 / 우리를 증언하고자 하는 약간의 충동과 열렬한 미학적 동기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예술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마지막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완고한 울타리를 파괴하고 싶었고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모험을 감행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시를 좋아했다. 많은 시집과 시론을 읽었다. 시인은 마치 연금술사 같다. 그러나 멜랑콜리하긴 하지만 시적 재능과 감수성, 상상력, 익숙한 일상 언어와 낯선 시적 언어 간 차별성에 관한 감각, 시적 언어의 응집성과 중의성, 흐릿함과 불확실성, 언어의 리듬 감각이 부족하고 정신적 엄격성이 결여된 내가 시를 잘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독자 (또는 청자에게) 시적 대상에 대한 특별한 인식과 함께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의미적 또는 문체적 일탈이 일으키는 ‘놀랍고, 힘있고, 낯선 무엇’이라는 텍스트의 ‘전경화’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시에 있어서 시행의 형태와 위치라는 관점에서 ‘낯설게 하기’는 나에게는 도저희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현대시는 언어의 감각적 힘에 경도된 나머지 언어를 파편화시키고, 문법과 관습을 파괴하고 의미를 해체하고 있으니 어찌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주 일찍부터 시 쓰기를 포기했다.

나는 입체파 화가들처럼 입체적 플롯, 자기 내면이 강한, 규범적이고, 고독한, 특별한 성격의 작중 인물, 인간 삶의 근원적인 것에 물음을 던지는 주제, 무엇보다도 나만의 독특한 컬러를 가진 미학적이고 섬세하고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문체에 집착한다. 나는 서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산문에서 소설과 시의 중간쯤인 서정성이 풍부한 글을 쓰려고 무진 애를 쓴다. 항상 적절한 단어와 문구는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해서 완벽한 문장과 문단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가 바라던,(나의 예술가적 영혼을, 내 온전한 애정을, 내 모든 증오를 집어넣은) 가상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때 칸트가 말한 ‘미학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허구가 아니고 모두 진짜 현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작가적 진실성으로 독자를 현혹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개연성과 핍진성.

그런데 소설에는 다른 예술의 형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 있다. 나는 창조주, 신이 된다. 하지만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작품을 쓰게 되지 않을까. 서사 능력이 고갈되어 쓰고 쓰다가 막히면 결국 미완으로 남을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 즉시 글 쓰는 것을 그만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휠덜린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처럼 말이다. (나는 휠덜린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불을 찬양했고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했으니 에트나 화산의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영원히 신으로 남으려 했던 것이다. 불은 생명의 근원이고 파괴의 근원이다. 불은 마지막 정화이다. 장엄한 불과 신적 인간의 죽음. 그걸 어떻게 인간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휠덜린은 튀빙겐의 탑 속에서 36년 동안이나 혼자 살며 글을 썼지만 끝내 완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정신분열증에 걸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광기는 위장된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작가는 허황된 소리에 불과한 ‘영감’이 아니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오르한 파묵이 말한 오스만 터키의 속담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쓰고 또 쓰고.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그러나 나는 아주 최근에서야 인간에게 영감이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나 많은 사악하고 나쁜 영감이 인간의 무의식 속에 배태되어 있겠는가. 그러므로 영감이 인간을 혹은 작가를 올바른 길이 아니라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 또는 연쇄살인범들은 어떤 영감 때문에 희대의 악마가 되었을까.)

나는 (지금쯤 국가와 사회의 집단 기억에서 사라진 전쟁인) 월남전 참전, 나트랑 102 야전병원, 생사의 기로를 헤매야 했던 정체불명의 열병, 환각과 망상, 죽음의 공포, 그리고 그 전쟁에 대한 섬광과 같은 총체적 기억이 일으킨 정서적 트라우마 때문에 평생 동안 상상력 과잉이었고, 불안증과 공포감, 편집 성향, 과대망상에 시달렸기 때문에 글쓰기는 즐거움 (또는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 강박관념이었다. 쓰고 또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절제와 금기가 필요하다. 번지르르한 미사여구로 설교를 기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란 결국 자기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하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야만 하니까, 자의식 과잉이고,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나이에 한심할 정도로 무명작가일 뿐이다. 그게 멸시받은, 저주받은 작가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내가 베스트셀러를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여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내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는 소설의 문학적 가치 또는 책으로서의 완성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대부분 상업적 수단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다. 여기에 대중의 변덕이 부동符同한다. 그러니까 그게 어중이떠중이들이 들고 다니는 허접쓰레기 같다면 내가 그런 걸 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모델 독자가 필요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관점에 따라 특정한 부분을 다른 부분보다 중요시하고, 별로 흥미롭지 않아 보이고 생뚱맞게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해석을 시도하고, 일부 대목이 애매모호하거나 이해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러한 모순을 말이 되도록 읽으면서 스스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 몇 사람이라도 내 소설의 배경과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소설 속에서 독자 나름의 분석과 해석, 추론을 통해 창조적 행위인 작가도 모르는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의미를 찾아내는 진지한 독자가 필요한 것이다.

신비평이론에서는 ‘의도의 오류’라고 했고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이라고 표현했듯이, 독자의 텍스트에 대한 창조적 개입에 의한 내재적 해석, 다시 말하면 독자가 스스로 해석의 맥락을 구축한다면, 왜 그게 불가능하겠는가?

독자는 작가와 함께 책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작가는 소설을 매개로 하여 독자와 일대일로 만나니까, 그러니까 한 권의 소설에는 오직 한 명의 독자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 독자가 현명한 독자이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질없는, 터무니없는 몽상이 아닐까. 내가 지금 어이없게도 무슨 독자를 운운하고 있는가. 내가 감히 현명한 독자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말했었다. 일부를 발췌해서 재론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세상에 얼굴을 들이밀고 나온 얼마 되지도 않은 내 작품들에는 소위 말하는 메타 텍스트적 또는 상호 텍스트적 요소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들어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야할 것이다.

소설은 자기 자신 속에서, 독자 속에서, 작가 속에서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독자들의 몫인 해석을 스스로 하고 그것을 끝까지 해체한다. 그것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의 실재를 세밀하게 포착하여 개별적으로 쪼개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자료와 주석을 참고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내가 구축한 세계를 더욱더 확장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담론을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되풀이 되는 특정한 인물과 주제. 주제가 반복되고 주인공의 목소리가 누적되면 하나의 총체적인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걸 가지고 전혀 근거가 없고 개념 정리가 안 된 해괴망측한 용어인 자기 표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의 뒤에는 그 인물들의 또 다른 삶이 있다. 그 작중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소위 후일담, 그 후 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은가. 그런 이야기를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

다만 작가가 자신의 창작 과정을 지루하게 내세우면 그건 촌스럽고 오만하고 진부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예술가여! 창작은 하되 말하지는 말라!’ 라는 금언을 되새겨야 하리라. 그러나 이는 유명작가에게나 해당하는 일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나 같은 무명에게는 상관없는 일 아니겠는가.

내 나이 60을 넘어서니 이제 서야 철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고 세상일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論語의 六十而耳順이라는 경구가 비로소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 꼭 쓰고 싶다면 세상을 알아야할 만큼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소설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사상누각처럼 곧 허물어져 버리는 초라한) 자신감이 생긴다. 유능한 작가란 작가 자신이 내면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숙해야만 세상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 상극하는 모순된 목소리와 세계관들이 생생하게 얽히고설키면서 좋은 소설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헤테로글로시아 heteroglossia.

나도 지금쯤 마음만 굳게 먹으면 어떠한 세상이라도 창조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언제쯤이면 ‘내가 정말 작가일까’하고 자문자답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실패한 작가임이 판명난 후라도 말이다. 그러나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전에는 제대로 된 단 한 편의 에세이나 소설 같은 산문을 써본 적이 없었으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한 때는 문학청년이었는데 내가 그동안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에 정신적으로 동맥경화에 걸리는 때인 이 나이에 무슨 소설을 쓴다고 하면, 소설작가가 되겠다고 우기면, 누군들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겠는가? 남들은 20대에 등단해서 젊은 시절 한창 문명을 날리고 60대쯤이면 벌써 반 은퇴하여 원로 대접을 받는 데 말이다.

더욱이 미국 작가 조나단 레덤의 친구인 작가 (그의 이름은 모른다.)는 “역사적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소설가들은 35세에서 50세까지의 나이가 전성기라는 사실을, 그 나이가 바로 젊음의 열정과 경험이 만나는 교차로이다.”라고 말했는데.

내가 10년 전쯤, 사하라의 초고 30매 정도를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진지한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한결같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본업인 대학교수나 변호사 일에 전염하라고, 격려 아닌 격려를 쏟아냈다. 그들 모두가 문학에는 거의 무지막지한 수준의 동료 변호사였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 막역한 후배인 Y변호사를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형님, 제발 그만 두세요. 유치한 짓 그만 두란 말이에요. 사람들이 노망들었다고 욕할 거예요.”하면서, 노골적으로 핀잔을 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취중진담이라고나 할까. 나는 아연실색 하였다. 내 하찮은 소설이 아니라 무릇 인간의 한심함 때문에 오랫동안 절망하였다.

그러나, 그런 노골적인 야유도 나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커다란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 충고를 해주거나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에게는 고독이 필요하다. 오직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자신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만 한다.

말랑말랑한 감성적인 글을 쓰는 일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학술논문이나 법학 전문서를 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쾌한 일이다. 우선 글과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교류하면서 서로 유쾌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펜은 지금 시대에 원시적인 필기구이다. 나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길 줄을 모른다. 그걸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오직 손으로 고통스럽게 쓰면서 내 몸과 글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느낀다. 말들이 내 몸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여러분은 느리게 쓰는 기쁨을 아는가. 종이 위에 끄적거리는 감각을 아는가. 우리는 가끔 글이 엄청 편리하다는 사실을 까먹는다. 가장 단순한 도구들만 있으면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그 운율 때문에 감탄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말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줄은 미처 모르고 살아 온 것이다.

구석 방.

그 방 (내가 그 당시 소속된 로펌의, 소송서류 더미가 여기저기 잔뜩 널려있고 법률서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내 사무실이었는데)은 남향이여서 고층 빌딩 사이를 뚫고 침입한 햇빛이 늘 찬란하였다. 그 빛의 수다스러운 달변이 나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다. 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하였다. 나는 그때 자포자기하여, 또는 의혹과 자기불신 때문에 사악한 범죄를 마음속에 상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폭력이나 칼을 휘두르는 상해, 살인, 간통, 형법 제201조가 규정하는 범죄를, 그 중에서도 간통을, 그렇다면 마음속에 상대가 있었던가, 물론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욕망을 자극하는 여자가 있었긴 하다. (그러나 그 후 형법상 간통죄는 사라졌으니 얼마나 후련한 일인가.)

아니면 하릴없이 비감에 젖어 황폐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던가. 패배는 인간의 영혼에게 승리보다 깊게 침투한다. 패배는 비장함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리한 그리스 도시들보다 비극적으로 패배한 트로이를 더 기억한다.

그 경이로운 빛이 나의 가슴 속에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내 가슴 속 심연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그래서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쳤다. 읽고, 쓰는 일처럼 괴롭고 유쾌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한 문장을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을 때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 마침표는 배가 항구에 도착하여 바다 밑바닥으로 던지는 무거운 닻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늘 불만족스럽다. 단 한 번도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다. 문장의 밀도와 완성도가 괜찮은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날 괴롭힌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쓰레기가 아닌지, 얼마나 지루하고 보잘 것 없는지, 그런 느낌을 받는 날이 많다. 그러므로 나는 취미삼아, 재미삼아 쓰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다 소진하는 일이니 한갓 취미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설이란 쓰는 것이 아니라 제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왜 쓰는지를 모른다. 나는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잘 모른다. 다만 글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 때문에 글을 쓰고 글을 써야 이야기가 생기기 때문에 쓰고 있다.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한 주에도 수십 장의 글을 썼다. 변호사의 주 업무인 소장이나 답변서, 준비서면, 가끔 형사 고소장, 법률의견서 등을 쓰는 일 말이다. 그 이외에도 나의 주 전공인 국제거래와 신용장거래, 금융거래와 관련해서 제법 두툼한 법학전문서 12권, 이들 분야에 대한 90여 편의 학술논문과 판례평석을 발표하였다.

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유머라곤 한 마디 없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법률전문가를 위한 난해한 글 말이다.

그리고 200여 편의 사설과 기타 칼럼을 마감시간에 쫓겨서 두서없이 갈겨썼다.

그것들은 모두 한결 같이 너무나 직설적이고 명쾌하며, 한 치의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되는 논리 정연한 존재들이었다. 법은 아주 단순명쾌한 것이다. 유죄이면 유죄이고 무죄이면 무죄이다. 유죄도 아니고 무죄도 아닌 중간 영역은 있을 수 없다. 애매모호한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법은 단순명쾌하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다. 그러니 법률 문서도 단순명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세상만사, 인생사 중에서 어느 것 한가지인들 그렇게 명쾌하고 논리적일 것인가. 모두가 불분명하고 확실치 않은 것 투성이일 뿐이다. 인간 삶의 조건 역시 의문투성이인 것이다. 그러니 주식투자도, 사람 사는 일도 고달픈 것이다.

나도 지금쯤은 그 지겨운 흑백논리의 멍에를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는 분명히 중간 영역인 회색의 영역이 무수히 존재한다.

유럽에서 중세가 끝나가고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 왜 연옥의 개념이 탄생했는가. 더 이상 지옥과 천국이라는 이분법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지옥도 아니고 천국도 아닌 중간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단테는 불후의 명작인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 천국을 묘사했다.

그렇다. 세상을 살다보면 흑백논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희끄무레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래서, 완전히 검거나 완전히 희거나, 완전히 나쁘거나 완전히 좋은 건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악과 선, 미와 추, 진실과 진실의 부재가 사이좋게 공존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애매모호하여 대부분 회색인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나는 그것이 이 세상을 가장 정직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세상의 허공에 대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왜 없겠는가. 나는 세상과 풍경을, 사건과 사물을, 실재를 오직 이야기로 풀어내야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막 이야기인가. 사막에는 완벽한 침묵이 존재한다. 사막에서 유일하게 귀중한 말은 침묵이다. 그곳에서 인간의 목소리는 언어가 되기 전에 먼저 침묵과 조우한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황량한 사막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대지에서 울리는 느낌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 사막은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주술적 마력을 갖고 있었다. 초인간적인 대지의 기운이 엄청난 힘으로 인간의 영혼을 빨아들인다.

요즈음의 경박한 세상에는 하찮은 일상을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수필이나 에세이류, 여행기 또는 신변잡담을 무슨 의식의 흐름 수법이라는 그럴듯한 미명 하에 주절주절 써놓은 일기장 같은 소설, 자폐증에 걸린 사람의 중얼거림 같은 소설, 새로운 것, 신기한 것에 강박관념이 든 나머지 얼토당토 않는 해괴망측한 소설들이 넘쳐 난다. 그리고 언제까지 향토적이고 토속적이어야만 하는가? 그것이 한국적이란 말인가? 언제까지 타령을 할 것인가. 왜 한이 우리 민족만의 고유 정서이겠는가. 무슨 근거로? 언제부터? 글쎄, (패배의식에 젖어서 자포자기하게 하고 숙명론에 빠지게 만드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임에 틀림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정서이다. 이 세상 어디인들 분하고 억울한 일, 크고 작은 원한이 없는 사람이 없겠는가. 잘 살고 부강한 나라인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는 그런 한 많은 사람이 없단 말인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박해받고 사는 사회적 소수자는 어디에도 있다.

그러므로 찌질이들의 찌질한 삶. 가난한 사람들의 고달픈 삶. 그것만이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보게들 궁상 좀 그만 떨게. 우리 삶의 영역이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 배달민족이 세계 방방곡곡 구석구석까지 진출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의 끝인 파타고니아까지. 이제는 인간 삶의 보편적인 주제를 찾아서 세계의 독자들을 향해 글을 써야 되지 않겠는가.

지구촌. 국제화. 세계화.

옛날 동아건설이 사하라에 간지는 20년도 넘었다. 사하라의 토착 유목민은 투아레그족이지 않은가.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수만 년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의, 익명의, 이름 있는 이야기꾼, 작가들이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넘게 똑같은 형식과 내용, 재료, 주제를 가지고 소설을 우려먹었으니, 단언컨대 새로운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의 변형이고, 변주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이미 쓰여 졌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미 3,000여 년 전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작가도 무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위대한 작가들 중에서 누가 무에서 창조를 이루어냈을까. 그들은 무에서 작품을 창조한 조물주란 말인가. 우리가 쓰는 언어를 누가 발명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우리는 다만 과거를 기억하고, 모방하고, 가끔 훔칠 뿐이다. 나의 언어 속에는 남모르게 훔친 남의 글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거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남의 것을 훔치고 모방을 하며 배운다. 내가 무슨 탁월한 상상력이나 번뜩이는 영감이 있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모방. 모방의 모방. 절도. 모조품. 반복. 위선. 위악. 진부함. 클리셰 Cliché.

그런데 모방과 절도의 가장 고귀한 형태인 표절의 한계는?

최근 문학이론가들은 그걸 ‘상호텍스트’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한껏 미화시키고 있다. 그들은 애써 표절의 문제점을 외면한 채로 모방 또는 영감이라고 하였다. 모든 작품은 다른 많은 작품들과의 연결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작품은 그것이 선택하고 반복하고 변형하여 도전하는 이전의 작품들에 의해서만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는 결코 근원적인 몸짓이 아닌 다만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고, 그의 유일한 권한은 글쓰기를 뒤섞거나 대립하게 하여 그 중 어느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글에서는 변용과 증식이 일어난다.

바르트는 문학에 있어 모방이나 표절의 문제는 어쩌면 문학 언어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견해를 표명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저작권 개념을 원리적으로 부정했다.)

그렇다면, 나의 경우 주로 누구로부터 모방을 하고 배우고 있는가. 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무작정 읽었으니까 널리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별히 누구로부터라고 의식하지는 못 한다. 그러나 작가가 지독하게 읽지 않으면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수천 권의 책 (그 책들은 우선 소설에서부터 역사, 철학, 문학, 법학, 생물학, 동물학, 천문학, 지리, 여행기, 기타 잡서 등등 수십 종에 달하지만)을 읽고 또 읽었고, 지금도 매일 눈이 짓무르도록 매일 책을 읽고 있으니,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그 수많은 경우를 어떻게 기억할 수 없다.

나는 호르헤스가 말한 기억의 천재 ‘푸네스’도 아라비안나이트에서 1001개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 ‘세헤라자데’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참으로 애매하고 모호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조금 전 일도 그렇다.

다만 그들 책들로부터 무슨 대단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책들의 의미와 내용이 내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 깊이 스며들어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소설들은 이야기는 내용이 너무 빈약하고 변곡점에서 느닷없이 또는 지나치게 비틀어서 탈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지겨워서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랬으니 현대 소설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와 비교하면 그 역사가 극히 짧은 젊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일부 평론가들과 작가들 스스로 소설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수요는 늘어나지 않고 계속 줄어드는데 이상한 소설은 공급과잉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모든 예술 형식 중에서 충분하리 만큼 열려있고, 길고, 폭 넓고, 대담하고 진득하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상처를 입기는 하겠지만, 어떻든 영원히 살아남을 만큼 내구성이 있는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유명한 학자이면서 중국 최초의 직업 변호사였던 등석은 논변 이론에서 좋은 말을 ‘큰말 大辯’이라고 하였고, 하찮은 말 또는 나쁜 말을 ‘작은말 小辯’이라고 분류하였으니 소설은 분명히 하찮고 나쁜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小說은 中說도 아니고 大說도 아니고 雜說이다. 소설은 잡초처럼 질기고 포용 능력 역시 한계가 없다. 소설은 잡설이므로 그 내용 속에 논문이나 학설, 시나 에세이, 르포, 잠언, 오마주, 패러디, 독백, 철학이나 과학, 온갖 잡설을 다 풍부하게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소설의 정체성은 훼손되지 않으니. 오! 너무나 위대한 잡설이여.

이제는 소설의 본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인간의 일생이란 삶과 죽음의 연속과 순환이다. 처음, 중간,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 역시 그러한 연속과 순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소설은 살아남을 것이다.

인류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이고 스토리리슨닝 애니멀이기 때문에 결코 이야기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타자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교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의 본질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음식 섭취에 대한 욕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이다. 우리는 천일야화를 읽으면서 인간의 그 욕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정확한 세부 묘사를 통하여 리얼리티가 살아있어야 한다. 이게 소설에 대한 나의 확고한 지론이다.

롤랑 바르트는 강조했다. 소설에서 세부적인 것이야말로 즐거움의 대상이어서 텍스트를 읽게 하므로 세부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가장 덜 오염되기 때문에 따라서 가장 생명력이 긴 것으로 간주하였다. 실상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살아남는 것은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아닌 바로 아주 세부적인 삶의 일상적인 양상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또는 (지금은 이미 사라져버린 장르인) 마술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소설일지라도 그 소설이 구축한 허구의 세계 속에서 인과관계가, 앞뒤가 잘 들어맞는 꽉 짜인 이야기여야 할 것이다.

소설은 현실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성실해야 한다. ‘왜 소설보다 현실이 이상해 보이는가. 소설은 어쨌거나 말이 되어야 한다.’(마크 트웨인) ‘……소설을 쓰려고 할 때 작가는 가능한 선까지, 그리고 가능한 한 자세히 소설이라는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움베르토 에코)

그렇다고 19세기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에서 비극의 원칙으로 가장 중요시 했던 반전이나 반전의 반전, 반전의 연속이 소설에 필수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에코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대해서 ‘과잉의 시학’이라고 하였다.

나는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의 오랜 경험은 인간 내면의 가치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삶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으면 삶에 대한 희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걸 잃은 후에야 겨우 뭔가를 깨닫는다. 나는 인간 삶과 죽음의 조건, 인간의 운명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탐구할 생각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 안에 죽음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고 죽음의 시작이 삶이다. 죽음은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것이다.

 

장편소설 사하라에서 김규현(金圭賢)은 투아레그족 청년 이브라함(Ibraham)과 함께 사하라 사막 남쪽을 여행하던 중, 고물 자동차가 고장 나고 사막 속의 사막에 갇히면서 목이 말라 갈증 때문에 죽는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과격하게 말하면 그는 사막에 완전히 매혹되어 사막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사막에서 목말라서 갈증으로 죽어야 했지만, 나는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결코 사막에 완전히 매료된 바도 없고 더욱이 사막에 미친 사람도 아니다. 이 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순진한 독자들 몇몇은 자주 그와 나를 동일한 인물로 오인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소설의 화자와 작중 인물의 타자성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작가는 배우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작가는 배우처럼 자기와는 전혀 다른 배역과 다른 인간성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상상적 세계인 소설 속 인물을 실제 인물과 동일시하고 싶은 독자의 정당한 욕망을 이해한다. 작가와 소설의 주인공이 미분화된 고백 형식의 사소설, 1인칭 소설이 한 때 (일본의 초기 자연주의 문학 시절) 일본 소설의 전통이 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실재하는 인물이거나 어떤 인물의 모방이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어리석고, 무구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가 있을까. 왜 그는 모진 고통 속에서 살다가 일찍 죽어야만 했는가. 이게 이 긴 소설이 독자들에게 제기하는 진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는 온갖 죄악과 부조리, 고통과 고난이 이토록 많은 것인가. 사악한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인간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무구한 사람이 크나큰 고통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정의로운 인간이 사악한 인간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사악한 인간들이 횡행하고 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 지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는가. 정말 위대한 유일신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기독교의 종말론적 계시론은 ‘때가 온다.’고, 악의 시대가 거의 끝나간다고 강조했다. ‘회개하라, 복음을 철썩 같이 믿어라.’ 그리고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어떤 고통도 없고 가난도 없는, 진리와 정의, 평화만 있는 유토피아,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2,000년이 넘게 기다렸지만 어떤 기미도 느낄 수 없으니 독실한 범신론자인 내가 유일신을 믿지 않는 이유이다. 나는 이 세상에는 악과 선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고 악의 세력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믿는다. 악은 필요악이고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부 독자들은 말한다. “소설이 쓸데없이 어려워요. 그래서 몇 장 넘기다 읽기를 포기했지요.”, “소설에 깊이가 있기는 해요.”, “소설이 너무 재미없어요. 재미가 없으면 소설이 아니지요” (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지루하다는 것이다. 소설의 지루함이란? 왜 소설이 꼭 재미있어야 할 책무라도 있다는 말인가? 왜 소설이 난해하고 불투명하고 지리멸렬하면 안 되는가.), “김규현이 누구예요. 인터넷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사람이 없어요. 실제 인물이 맞나요.”, “그런데 사하라에는 몇 번이나 다녀왔지요?”

나는 그 말들을 듣는 순간 그들이 그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음을 눈치 챘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 더 주의 깊게 끝까지 읽어보세요.”라고 말할 용기는 없다. 일상생활에서 너무 바쁜 그들이 그걸 왜 읽겠는가. 수긍이 간다. (그러니까 폴 오스터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글쓰기를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고 아무도 원치 않는 것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스탕달은 1822년에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연애론을 출간했지만 그 당시에는 11년 동안 단 17권 밖에 팔리지 않았다. 그때 출간 당시 스탕달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그 책의 평판이 어떤지, 출판사에 넌지시 물어 보았다. 출판사 영업 직원이 대답했다. “그것은 신성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도 집어 들거나 펴보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사하라는 지금 신성한 책이 되었다.

커트 보네거트는 일단 책을 발표하고 나면 그 작품은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이고 세상으로 나간 책은 자신만의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소설에 대해 자부심과 자포자기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러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실낱같은 존재의 개연성만 있어도 그 책은 얼마든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그 책도 가냘픈 생명력으로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책을 다시 읽기가 민망하면서도 여전히 그걸 붙잡고 있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내게는 너무 중요하다. 소설의 배경을 바라볼 때 대가는 그것을 단지 충실하게 묘사하는 일은 피하는 법이어서 사실 그대로 그리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본질만을 전달하려고 한다는데, 나는 대가는커녕…….

 

그래서 반복해서 세밀한 묘사에 집착하고, 밀란 쿤데라가 말한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분주하고, 소설은 이야기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우화적인 의미를 동시에 담아내야 하느냐를 가지고 고심하고, 너무 진지하고 지나칠 정도로 엄숙한 것은 현대의 이단이기 때문에 유머와 난센스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느끼고, 내 주변의 이야기, 사소설은 대부분 너무나 어리석고 사소한 주제이기 때문에 결코 써서는 안 될 것이다. 특이한 단어를 발견하면 지워버리고 평이한 단어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뻔하고 흔해빠진 상투적 어구만은 피해야만 한다. 내가 창조했던 인물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가 까칠하고 악인인 경우에도 말이다. 표현이 멋있지만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을, 문단을 살리려고 하지 말고 버릴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과감하게 삭제하면 미심적었던 부분 전체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상상력을 무한정 발휘할 수 있으니까 쉬워 보이지 않는가, 또 환상특급 같은 부류의 소설은 어떠한가, 어쨌거나 기괴한 이야기들 아닌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니 나의 경우는 고지식한 엄숙주의 때문에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일상생활에서나 소설에서 애매하거나 무질서한 것을 견디질 못하는 습성을 이제는 버려야만 하지 않을까, 지금쯤은 절대로 못 버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군가 소설은 과도해지기 쉬운 장르라고 지적했지만 (보르헤스는 “모든 장편소설은,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군더더기가 들어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단 한편의 장편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가망 없을 정도로 소설이 지루하게 길어지면 안 되니까, 적당한 선에서 끊거나 삭제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이야기를 어디에서 끝맺을 것인가? 그걸 어떻게 잘 알 수 있을 것인가. 작중 인물이 작가로부터 해방되어 질주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철저히 통제해야만 하는가, 인간의 내면 속으로 파고들어 가야한다. 내가 누굴 흉내 낼 수 있을까, 지금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누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부인하고 싶기 때문에, 아니면 숨기고 싶어서인가. 나는 소설에서 역사적, 지적 요소를 중요시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야기 속 인물과 행동, 사건 속에 녹아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역사는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역사는 허구이고 기껏해야 반쯤만 진실이 아닐까, 역사는 선택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에 쓰여지지 않은, 역사에 편입되지 않은 무시되고 버려진 수많은 사람, 사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실제 역사의 주체이면서 역사에 희생돼 매몰되어 버린 사람들을 철저히 무시한다. 소설의 모든 요소가 왜 시계장치처럼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 할 것인가, 좀 더 혼란스럽고 거칠고 대담하면 어떻게 될까, 19세기 정통 리얼리즘 소설처럼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한, 견고한 플롯과 인물, 토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보다 더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것은 없다. 헤밍웨이처럼, 내가 한 편의 이야기를 끝 마쳤을 때 텅 비고, 슬픈 느낌이면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철학적 주제와 관련한 사색을 소설의 기본 토대로 삼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제시된 수많은 테마들과 모티브들이 변주되면서 분해되고 용해되며 서로 뒤엉켜서 화음을 이루고 결국에는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타고난 소설가는 아니기 때문에 또한 지금쯤 모든 감수성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면 표류하지 말고 계속 열심히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강박적일 만큼 헌신과 열정,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감 부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심혈을 기울여 몇 번씩이나 수정하고 있다. 결벽에 가까운 수정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이건 우울한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글이란 수정하지 않으면 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발표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고치고 또 고쳐야 한다. 고쳐야만 한 편의 글이 탄생한다. 소설도, 시도, 에세이도, 편지도, 소장이나 준비서면도 고치고 고쳐야 한다. 내가 아는 한 톨스토이도, 헤밍웨이도, 피츠제럴드도, 샤토브리앙도, 드 메스트르도, 밀란 쿤데라도, 최인훈도, 소설가 모두, 시인들도 모두 끊임없이 수정했다. 르 메스트르는 그의 아오스토 골짜기의 문둥병자를 17번이나 고쳐 썼고,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결말 부분을 47번이나 고쳐 썼고, 프루스트는 죽기 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초판본을 고쳐 썼다.

 

무라카미 류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 소설에서 당신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그것에 대답할 수 있다면 소설 따위는 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음은 작가가 주제넘게도 해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독자의 입장에서 비평적 관점으로 말하는 것이다. 작가는 최초의 독자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내 안에서 작가와는 분리된 다른 존재, 즉 작가를 의심하는 비평가적 독자로 존재할 수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사하라는 소위 말하는 액자소설인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쓰고 또 쓰는 과정에서 전혀 작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많은 주제를 포용하게 되고 그 주제들이 위태롭게 소설의 구성을 떠받치고 있다.

그것은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사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칼날 위에 서서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다시 낳고,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강박증 환자였던 샤푸리 야르 왕은 이야기를 듣는데 몰입했고, 그래서 그들은 일시 그 상황을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선에 서있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여러 겹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이야기에 몰두했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죽음의 악몽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란 그런 것이다.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몰입하게 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롤랑 바르트가 ‘쓰는 사람의 영광, 감옥, 고독’이라고 한 순전히 개인적인 독특한 작가만의 언어 스타일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작가는 소설에 나타나는 특유하고 반복적인 언어 스타일과 소설의 구조, 테마 등에 의해 소설의 정체성 (narrative identity)을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사하라는, 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유럽으로 건너온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서구 문명사회에서 온갖 풍상과 슬픔, 모멸을 겪은 사람, 사막의 여행 가이드 이브라함과 건축설계사이면서 오직 정글과 사막만을 여행하는, 오디세우스처럼 험한 길을 방랑하는 건축 설계와 감리, 엔지니어링 회사인 (주)공간의 김규현 상무가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서 갈증으로 죽는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들이 사막 도시 타만라세트를 출발한 것은 2000년 6월 15일 이른 아침이었다. 그 며칠 후 사하라 남쪽에서 사막의 미로에 갇혔다. 김규현 상무는 44세의 나이로 7월 9일 죽었다. 이브라함은 그 이틀 전에 죽었는데 짐작키로는 32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 이상 내일은 없었다. 오직 과거를 이야기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자신의 지나온 인생 역정을 담담하게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소설 사하라는 분해 또는 해체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 조각들을 주워 모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하라 남쪽 사막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참하게 죽게 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여행소설이어서 여행의 의미, 그것의 목적,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의 허무감, 호모 에렉투스인 인간이 어떻게 해서 허리를 펴고 걷게 되었는지, 걷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난다.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또는 고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난다. (김규현과 이브라함처럼 말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고향에 대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평생 동안 고통을 받았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고향은 ‘고향의 푸른 잔디(green green grass of home)’처럼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그리움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향과의 단절은 끊임없는 고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리의 이별’에서 H처럼 말이다.)

미학적 토대에서 인간 삶의 조건, 삶과 죽음,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신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신은 존재하는지 마는지, 신은 살았다가 언제부터인가 죽어버렸는지, 그건 타살인지 자살인지. 사막에는 정말 신이 존재하는지, 김규현은 자신의 신을 찾았는지, 그 신이 그를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지, 꿈이 무엇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꿈을 꿔야 하는지, 꿈은 영혼의 자양분이다. 인간의 운명은 무어란 말인가, 운명까지도 유위전변有爲轉變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운명은 예정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면 작가의 길고 긴 삶의 궤적에서 작가의 크고 작은 운명들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그리고 전쟁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20세기는 위대한 전쟁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애당초 더 참혹한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을 잉태하고 있었지 않은가. (그래서 존 키간은 “대부분의 성인에게 전쟁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것이 20세기의 비극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이 남긴 참화가 개개 가족과 인간에게 끼친 후유증은 인간 비극 그 자체이다. 자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 뫼즈 강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5년을 보냈다. 김규현의 두 삼촌은 6.25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거의 폐인처럼 살다가 바다에서 자살한 것처럼 죽었다. 작가는 1969년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전쟁에 직접 참여했건 목격자에 불과했던 간에 그 후 오랫 동안 전쟁이 남긴 정서적, 심리적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된다.

작가는 사하라에서 이러한 전쟁의 비극을 주제로 삼아서 고발하려고 의도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책은 작가 자신을 위해 썼던 것일까.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 유령을 위해 썼을 수도 있다. 지금 세상에 누가 전쟁의 비극에 관심이 있겠는가.

그런데 주제어 key word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소설의 구성에 있어서 미학적 욕망이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로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소설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들은 소설 속에서 인물들의 모티프, 행동과 실존적 상황을 통해서 점차 드러나게 된다.

사하라, 사막, 낙타, 사막의 도시 타만라세트, 거룩한 신부님, 유목민인 투아레그족, 아프리카, 사바나, 사헬지대, 밀림, 원시 부족, 분쟁, 사자, 에이즈, 남쪽 바다, 늙은 여자, 사이코패스, 종교의 타락, 무슬림, 움미인 마호메트, 위대한 여행가 오디세우스, 불운한 반 고흐, 영원한 여성인 어머니, 언제나 그리운 동생, 갈증과 죽음, 고독, 침묵, 망각,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미래, 절망, 농담, 희극, 무無, 무無相 無常 無想, 등등.

또한, 김규현은 건축가이므로 건축의 미학, 그의 플라토닉 연인이었던 (그러나 플라톤은 살아생전에 이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손희승은 사진 작가였으므로 사진의 미학,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죽으면서 또다시 이별하므로 이별, 약간 멜로 드라마적이고 감상적이고 유미주의적이긴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와 그의 아내 심현숙은 열렬히 사랑하고 육체적 쾌락을 누리고 그리고 결별하였으므로, 달콤 씁쓸한 육체적 사랑과 쾌락의 의미, 에로티시즘, 오르가슴, 나르시시즘, 아이러니, 결별의 의미 같은 것 등.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창조한 작중 인물 모두를 깊이 사랑한다. 그래서 그는 동성애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일 것이다. 그는 그들 인물 중에서도 지극히 쾌락주의자이고, 현실적이고, 잔인하고, 개성이 강렬한 심현숙을 가장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팜므 파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처럼 능굴능신能屈能伸하게 변신하는 치명적인 악녀는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팜므 파탈은 프로이드가 히스테리아라고 명명했던 소름끼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녀는 밝고 건강했기 때문에 히스테리아 환자는 아니다. 그녀의 눈은 가끔 빛났지만 사악할 만큼 뇌쇄적이지는 않다. 그녀는 사치스럽고 변덕이 심했지만 옷차림새와 행동은 섹시하지 않다. 그녀는 고루한 관습과 심리적인 속박에서 해방된 자주적인 여성이었고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현명하다. 소설은 그녀의 그런 성격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작가는 지금도 그녀 같은 멋진 여자를 실제 만날 수 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겠는가.)

소설의 주제 중에서도 이별의 주제는 인간 삶의 조건, 삶과 죽음, 신의 존재 여부, 여행의 의미와 함께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뼈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순전히 작가의 견해일 뿐이다. 작가가 죽은 후라도 어떤 유별난 비평가가 나타나서 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 슐라이어마허는 ‘비평가는 작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안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비평할 용기와 함께 찬양하는 용기가 필요하리라.)

그런데 작가는 소설가가, 이야기꾼이 주제에 억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니 (때로는 그 개념이 가변적이고 모호해질 수 있는)몇 개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고, 고상한 단어들만이 주제어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모든 예술에는, 소설, 이야기, 희곡, 시, 음악, 미술, 조각, 영화, 드라마, 만화, 신문기사, 텔레비전 뉴스, 신중한 언어에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중요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모두가 주제가, 즉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제는 그것들의 본질적 특성인 것이다. 심지어 사소한 말, 농담에도 그것은 들어있다. 우리가 흔히 ‘뼈 있는 농담’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작가는 주제를 의식하거나 주제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에는 그것이 저절로 따라오니까 말이다.

그러나 조지 오웰은 성급하게도 모든 글쓰기는 프로파간다라고 결론지었다. 그가 말했다. “프로파간다는 모든 책의 심장부에 숨어 있다. 예술 작품은 어느 것이든 각각의 의미와 주제, 즉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 과정에서 아주 서투르게도 주제와 담론을 너무 명백하게 드러내 놓고 스스로 결정을 해버렸다. 그것은 희미하고 불명확하고 다의적이어서 그걸 둘러싼 해석의 갈등은 독자의 몫인데 말이다. 소설에는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야할, 작가가 주절주절 말하지 않고 비워두어야 하는 여백, 즉 빈자리 leerstelle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인 즉, 소설은 무엇을 쓰느냐 (또는 이야기 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데 작가는 여전히 어떻게 쓰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긴 소설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중첩되고 다양한 주제가 공존하고 있으니까 독자들은 자신만의 관점에서 읽고 싶은 대로 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내 소설에서 어떤 관점으로 무엇에 중점을 두고 읽게 되건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상관할 필요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건 독자의 몫이다.

다만, 무엇을, 무엇에 관해서 쓸 것인가, 주제와 담론과 관련해서 우리의 삶에서 근본적인 것들, 삶의 조건, 신이나 죽음, 자유 등의 문제에 대해 에세이를 쓰면, 에세이는 소설적인 기교나 우회로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명쾌하게 담대하게 쓸 수 있으니까, 나는 소설과 함께 여러 편의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독자들의 오독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친 듯한 반복. 쓸데없는 중복.

그러므로…… 이건 나에게는 유일한 사람인 현명한 독자를 오해하여 모욕하는 말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독자는 나의 불안과 강박, 경박성, 조급성, 충동적인 성격을 이해해야만 한다. 톨스토이는 ‘인간은 육체 안에서 무력하지만 정신 안에서는 자유롭다’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나는 여기에서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스스로 독자를 자처하면서 말했지만 다시 반복한다.

Ross, H.는 ‘문학 텍스트는 단지 뭔가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뭔가를 한다’라고 했으나, 나는 그 뭔가를 하는 일에 여전히 미숙하고, 그러니까 문학적으로 쓰는 능력이 부족하다. Iser, Wolfgang은 ‘문학텍스트는 독자가 채워야 할 틈을 남긴다’라고 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작품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제시한 부분과, 내가 쓰지 않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 두 번째 부분이 중요한 부분입니다’라고 했으나, 나는 소리의 침묵과 공간의 여백에 둔감하여 지리멸렬할 때까지 웅얼거린다.

지나친 강조와 과정 때문에 텍스트는 명료할 수 있지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말하지 않았어야 했던 어떤 것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칸트의 미학에 있어서 ‘무목적의 목적성’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걸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 개념을 나름 문자 그대로 차용해서 쓸 수는 없을까.

독자가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작품 속으로 무의식적으로 몰입하여 감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되고 타자와 이 세상에 대하여 연민의 감정과 함께 공감하게 된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사랑과 이별.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버린다면 그게 어찌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모든 이야기의 영원한 주제가 될 수 있었겠는가. 진지한 예술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의 실패에 관한 것이다. 성공은 대개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우리는 사랑하며 미워한다. 우리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별을 동반한다.

짧은 사랑과 긴 이별 또는 영원한 이별. 이런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사랑이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 한 번 이루어졌다가 영원히 잃어버리는 사랑을 말한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와 연인 라라의 사랑과 이별처럼 (그 짧은 만남이란), 또는 사하라에서 김규현과 손희승의 사랑과 이별처럼, 또는 이브라함과 만수라의 이별처럼 말이다.

이별은 천 년 전에도 그랬다.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선하면 아니 올세라……

김소월 시인은 32세 때 (1934년) 아편을 마시고 음독자살하였으니. 그는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라고 하였다. 떠나는 사람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분노와 배신감, 저주와 원망을 그렇게 쉽게 감출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한용운 시인은 ‘님의 침묵’에서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순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자신의 깊이를 모르게 마련이고(K. 지브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이다.(W. 쿠퍼) 그리고 모든 이별에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큰 고통이 뒤따른다. (C. 에이 루이스)

 

죽음과 이별.

죽음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한다. 이별은 삶의 무상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이별은 동의어가 아닐까. 이별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시공간의 멀어짐을 의미하지만,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운명적 결별을 의미하며 죽음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가장 강한 사람도 운명을 막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일찍 죽는다. 선한 사람은 일찍 죽고, 악인은 늦게 죽는다. only the good die young. 이게 바로 그 소설의 큰 테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김규현과 이브라함은 참으로 착하고 선한 사람이지만 불의에 일찍 죽기 때문이다. (물론 김규현은 자살한 것인지 여부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그는 사막을 사랑했으니까 사막에서 죽을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죽음은 자유를 예찬하고 열망했던 그에게 궁극적인 자유가 아니었을까.)

죽음은 필멸하는 모든 생명체의 숙명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뿐이거늘.’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누가 무엇 때문에 영원히 살기를 원하겠는가. 인생이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데.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매일 살아가면서 죽음을 겪는다. 성 바울이 말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인간의 죽음에는 천수를 다 누리고 죽는 자연사(이때는 집의 침대 또는 병원의 침대에서 편히 죽는다), 날벼락처럼 닥쳐오는 뜻밖의 돌연사나 사고사, 자살, 살인에 따른 죽음, 천재지변(act of god) 같은 신의 짓궂은 장난에 의한 죽음, 막다른 운명의 장난에 의한 죽음, 오만한 인간의 광기에 의한 죽음, 전쟁과 혁명에서의 죽음, 제도적 살인 예컨대 국가기관의 고문, 학살 (우리는 현대사에서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대학살, 크메르 루즈 대학살, 북한의 폭정과 학살을 기억할 수 있다.),인간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멍청한 판사에 의한 살인 선고와 그 집행 등에 의한 죽음이 있다.

굳이 죽음의 과정을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지만 이별은 남는다.

그러나, 이별은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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