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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설] 낙타
이름 유중원 이메일



낙 타

 

네 마리 낙타를 친구삼아 포르투갈의 왕자님 세계를 고루고루 유람한다.

낙타 네 마리가 있기만 한다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 아폴리네르

 

 

사막 이야기에는 낙타를 빼놓을 수 없다.

낙타는 사막을 위하여 태어나고, 사막에 잘 적응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진화를 거듭해온 동물이다. 이 강인하고 고집 센 동물은 입을 꾹 다문 채 코로만 숨을 쉬고, 둥글고 넓적한 발밑 두터운 발바닥이 쿠션 역할을 하므로 힘들다는 내색 없이 꿈꾸는 듯한 걸음걸이로 느릿느릿 걸어서 모래사막을 가로질러 나아갈 수 있다.

이 참을성이 많은 동물은 리듬에도 민감하였다. 유목민들은 낙타의 단순하면서도 미묘한 흔들림에 맞춰 낙타몰이꾼의 노래를 불렀다. 길게 줄지어 걸어가던 낙타들은 이 노래가 나오기 시작하면 고개를 쳐들고 걸음을 빨리 해야 하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흥겨운 리듬에 맞춰 머리를 밑으로 숙이고 목은 쭉 뻗은 채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낙타의 두꺼운 털가죽은 사막의 무서운 열기로부터 체온을 보호해주고, 넓적한 콧구멍과 긴 속눈썹은 거친 바람과 날아오는 모래를 막아준다.

더욱이 소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짐을 실을 수 있고, 바퀴가 굴러갈 수 없는 곳에서 소보다 두 배나 빨리 갈 수가 있으며, 시간 당 5킬로미터의 속도로 쉬지 않고 하루 15시간씩 10일간을 계속 걸을 수도 있다. 먹이는 적게 먹으면서 물은 한꺼번에 50갤런 이상까지 마셔 물 없이 열흘 가까이까지 버텨낼 수 있으며, 어둠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말을 잘 이해하며 수명까지 길다. 낙타는 고도로 농축된 소변과 마른 대변 등으로 불필요한 수분의 손실을 피할 수 있는 특유의 수분 저장 능력 때문에 메마른 사막을 잘도 버텨낸다. 땀은 최후의 순간에만 흘리므로 체온이 40도 이상이 되어야만 흘린다. 탈수 증세가 시작되면 몸무게의 3분의 1에 상당하는 수분을 잃어도 살 수 있으며 수분이 보충되면 다시 원상회복할 수 있다.

기원 초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사하라에 처음 들어온 단봉낙타는 우물 사이의 간격이 매우 먼 사막 여행에 아주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낙타를 ‘사막의 배’라고 불렀고, 사막 유목민들은 신이 내린 선물로 생각하여 낙타를 몹시 아끼고 최고의 재산목록으로 간주하였다. 사막에서 진짜 유목민은 낙타를 소유한 사람을 말한다. 가축 시장에서 낙타는 양 50마리, 소 10마리 값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사막에서 낙타는 매매와 교환을 함에 있어서 기준이 된다. 여자와 교환할 때도 교환의 대가는 낙타로 지급하였다. 아 아! 아름다운 여인이여! 아름다운 여인이여! 정말 아름답군요. 그 여자에게 낙타를 몇 마리 지불하면 가능한 가요? 그렇지. 낙타면 돼지. 그러나 몇 마리여야 하는지는 좀 더 따져봐야지 않겠어? 아름다운 여자이니까.

그런데, 가축은 유목 생활의 토대이고 부와 식생활의 원천이었으므로 신성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유목민에게 가축은 삶의 전부였다. 그들은 가축의 젖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가죽을 활용하고, 가축을 거래한다. 그러므로 가축이 죽으면 유목민도 죽는다. 유목민들은 양과 염소와 그 새끼들, 암낙타와 새끼들, 말들이 뒤섞여 있어도 낱낱이 자신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인간은 동물의 일부이고, 동물은 인간의 일부였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였다. 그들은 함께 사용하는 공용어가 있어서 의사소통을 잘 할 수 있었다.

특별히 낙타는 사막 유목민의 삶의 완전한 일부분이었고, 그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유목민처럼 낙타를 자식처럼 사랑하는 부족은 없을 것이다. (그랬으니 놀랍게도 아랍어에는 낙타와 그 관련 장비를 표현하는 단어가 무려 6,000여 개나 된다.) 그들은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낙타에게 속삭인다. 그들은 타고난 낙타몰이꾼이어서 길에 찍혀 있는 낙타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곳을 지나간 낙타가 암놈인지 수놈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등에 짐을 얼마나 실었고, 그 크기가 얼마인지 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낙타몰이꾼은 낙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위대한 예언자 마호메트도 12살 때부터 낙타몰이꾼이었고 목동이었다.

 

나는 1997년 5월 초순경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자 벼르고 벼르던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여행을 떠났다. 1년여에 걸친 대형 프로젝트의 설계 작업이 끝난 후 모처럼 두 달간의 장기 휴가를 얻은 것이다. 대형 설계사무소에서 매일 반복되는 기계적인 작업을 하면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안달을 하였다. 그 엄청난 피로와 쏟아지는 긴장 때문에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신경 줄을 잠시 풀어놓아야만 했다. 단지 머나먼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만이 의미가 있었다. 지금 당장 떠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그 사막의 아름다운 모래언덕이 나를 유혹하였다. 나를 비참한 죽음의 길로 안내하기 위해 유혹한 것이다.

그때는 젊고 튼튼한 쌍봉낙타 3마리를 비싼 값을 주고 빌려 여행용 짐과 낙타가 먹을 사료 등을 나눠 싣고, 위구르 출신의 이슬람교도이면서 노련한 낙타몰이꾼 겸 여행 안내자인 카심과 함께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는 항상 위구르의 전통 모자인 ‘돕바’를 쓰고 있고 모자 아래로는 회색 머리칼과 구레나룻가 무성하다. 그는 처음부터 엄중히 경고를 하였다. 이곳 사막에서는 독거미, 독을 품고 있는 작은 도마뱀, 여러 종류의 살모사, 독침을 갖고 있는 전갈, 사나운 모기들을 주의해야 한다고……. 잘못 물리면 고통 속에 몸을 뒤틀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그 사막의 동쪽에 있는, 교외에는 포플러 나무 숲과 백양 나무, 올리브 나무, 포도와 석류 농장, 멜론 농장 등이 펼쳐져 있고, 시내 중심가에는 위구르인들의 회교 사원이 있는 오아시스 도시인 루오치앙을 출발하여 체모, 민펑, 호탄 등을 거쳐 서쪽의 예청까지 낙타 목에 매단 청동 종의 둔탁한 종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40여 일 동안 천천히 걸어서 여행을 하였다.

그 작은 종소리는 유독 가벼운듯 하면서도 무겁게 끌린다. 그래서 여운이 길었다.

나는 훈련이 잘된 순한 암컷 낙타들과 함께 떠나는 그 여행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잘 훈련이 된 암컷 낙타들은 훨씬 얌전하고 온순하였기 때문에 조용히 명령에 따랐다. 그 낙타는 목을 가볍게 두드리기만 해도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았다. 그러나 아직 철이 덜 든 어린 낙타나 수컷 낙타 또는 조상의 혈통이 나쁜 낙타들은 여행 중에 조금만 지쳐도 몹시 투덜거리고 고집을 부려서 말썽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온종일 더위와 모래에 시달리면 낙타는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그때 낙타는 콧구멍이 양쪽 다 닫혀있는 것처럼 보였고 두 줄의 속눈썹이 달린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털이 수북한 귀를 힘없이 내려뜨리고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카심은 낙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 어느 낙타가 조금이라도 신음 소리를 내면 그는 금방 긴장하면서 초조해 하였다. 그는 멈춰 서서 낙타의 안색을 살피고, 배와 발굽을 살펴보고, 안장을 바로잡고, 물을 마시게 하고, 마른 풀잎을 먹이로 주었다. 밤이 되면 그는 안장을 내리고, 특히 기온이 내려가면 땅바닥에는 마른 풀과 헝겊을 깔고 두꺼운 담요를 덮어주었다.

나는 하루빨리 낙타와 친숙해지기 위해서 자주 낙타의 목덜미를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었으며, 그때마다 낙타는 그 답례로 화려한 속눈썹을 깜박이고 꼬리를 획획 흔들면서 손가락을 핥아주었다. 코를 찌르는 듯한 낙타의 지독한 침 냄새에도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카심의 낙타들은 낙타로서 갖출 수 있는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나 도저히 구제불능일 만큼 식탐이 강했다. 낙타들은 일단 먹이를 보면 서슴없이 꿀꺽 삼켜버렸다. 그런 다음 위장 속에 들어있는 먹이를 다시 게워내 우물우물 되새김질을 하곤 했는데, 그때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밤이 되어 천막 안에 누워 있으면 이해할 수 없는 사막의 속삭임과 함께 낙타들이 새김질을 하면서 내는 우물거리는 소릴 들을 수 있었다.

동이 트는 이른 아침이 되어 낙타몰이꾼이 낙타의 이름을 불러 깨우면 그것들은 끙끙거리면서 굼뜬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서 느릿느릿 주인에게로 걸어와 혀를 내밀며 아침 인사를 했다.

 

이제 나는 낙타들과 무척 친해졌는데 특히 호탄이라고 불리는 늙은 암낙타와 친하게 되었다. 그녀는 카심의 가족이었으니 그들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하고 특별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카심의 자식들에게는 엄마이고 할머니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녀는 완벽하게 침착했고 지혜롭게 처신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애정과 함께 존경하기까지 하였다.

카심은 말했다. “낙타를 사는 건 마누라 고르는 것보다 더 신중해야 하는 법이요.” 카심은 그녀가 어렸을 적에 정말 신중하게 골랐던 것 같다.

어느 날 저녁 밤은 깊었고 하늘의 별들은 총총한데 카심은 벌써 코를 드렁드렁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온 몸에 긴장을 풀고 뿌옇게 흐려져 잘 보이지 않는 한쪽 눈을 멍하니 허공에 매단 채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그러다가 약간 특별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는 그의 눈을 찬찬히 들어다 보았다. 그때 내가 낙타의 눈을 들어다보면 볼수록 동물의 눈이 아니라 사람의 눈으로 보였다. 나는 낙타를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랬으니 그들의 사고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그들의 영혼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먹이 자루를 옮겨주었지만 그녀는 썩 내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주인한테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친구가 낙타를 그렇게 사랑하니까, 동물을 의인화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말이지, 동물행동학자들처럼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진정한 일체감을 갖고 동물의 내부로 들어와서 동물의 시각으로 인간 세계를 바라보면 어떨까.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낙타의 뇌로 생각하고 낙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거지.

인간과 낙타는 많은 공통점이 있는 거야. 어미의 자궁에서 숙성된 다음 태어나고 한 동안 어미의 젖을 먹고 나서 성체가 되는 포유동물이고 척추동물인 거지.

인간들은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분법에 따라 무턱대고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고 있는데. 잘 알겠지만, 파리나 모기에서부터 개 말 낙타 사자 코끼리 침팬지까지 모두를 동물로 분류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 해서 미천한 벌레와 새들을 우리와 똑같이 취급할 수 있을까? 그게 인본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폭력성인거지. 인간들이 우리와 같은 동물을 근본적인 타자로 여겨 배제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인간들이 우리 없이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니까 포유동물을 다시 생각해보란 말이야. 특히 낙타는 인간과 함께 공존공생하고 있으니까. 낙타도 인간처럼 영혼이 있는 거야. 다만 낙타의 영혼은 동물이 가지고 있는 감성적 또는 감각적 영혼이지만 인간의 그것은 이성적 영혼인 거지. 이거 때문에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우쭐대는 거겠지.

그러나 낙타는 어미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고 흉내 내면서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만 인간들한테서 배울 것은 하나도 없지.

이건 주인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주인한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거야. 친구한테는 이야기할 수 있지.

우리 먼 조상은 북아메리카에서 요즈음의 토끼만한 크기로 살았어. 그랬으니 포식자인 늑대와 여우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 그 악마들을 피해서 베링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도망쳐 온 거지. 우린 거친 아시아 대륙에서 견뎌내기 위해 진화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러나 우린 잘생긴 얼굴과 미끈한 몸매, 언제나 주인을 반기는 애교 덩어리, 절대 배신을 모르는 충성스러운 애완견이 될 수는 없었어. 그러니까 애완견은 인간에게 아양을 떨고 절대 복종하는 충복인 거야. 노예 중의 노예인 거지.

그렇다고 말과도 비교할 수 없지. 내가 봐도 말이지, 말의 균형미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는 거야. 늠름하게 서있는 말을 보면 전율을 느끼게 되지. 말의 육체는 미학적 완결성과 그 질주 본능에 있어서 공학적 효율성이 결합된 신의 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우린 그런 점에서 말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우리가 못생기긴 했지만, 처음 보는 인간들은 마치 괴물인 것처럼 이상하게 바라보기도 하지만 말이지. 우리에게도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점과 미덕이 있는 거지. 다시 말하자면 조물주께서 여섯째 되는 날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그 날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는데, 왜 맨 나중이었겠어. 신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자신도 믿을 수가 없었던 거지. 그래서 만들지 안 만들지 고심하다가 맨 마지막으로 진흙을 이겨 만들었던 거야. 그런데도 어떤 어리석은 인간은, 왜 이렇게 못생겼어. 이렇게 못생긴 동물은 절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게 아니야. 하나님께서 절대로 이렇게 못난 것을 만드실 리가 없어,라고 말했지. 그러나 현명한 인간은 이 동물은 아주 못생겼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거니까 틀림없이 그것만의 독특한 용도가 있을 거야, 하며 두둔했었지. 그러니까 우린 무한한 인내심과 지구력을 가지고 있지.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말했었지. ‘몸이 튼튼한 낙타라면 대개 낙타보다는 낙타를 탄 사람이 먼저 지치고 만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우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인 거지. 사막의 배. 사막에서 견딜 수 있는 동물은 우리밖에 없어. 그러나 우리에게도 약점은 있어. 그건 순전히 인간들의 관점인데 말이지, 번식이 원활하지 않다는 거지. 암컷은 5세쯤 되어야만 성적으로 성숙하고 임신기간은 13개월이나 되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막론하고 색욕에 들뜬 인간들과 달리 교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지.

그렇지만 인간들은 우릴 삶의 동반자로, 여행의 동반자로 인정해주지 않는 거야. 인간은 때로는 우둔하고 잔인하지. 이솝우화에 나오는 낙타를 쓰러트린 마지막 짐 보따리 이야기처럼 말이야. 언젠가 뒤집힌 세상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역할이 뒤 바뀌어서 사람이 낙타를 업고 다닐지도 모르지.

나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사막에서 우리와 인간의 관계는 가축은 아닌 거야. 신과 인간들이 계약을 한 것처럼 우리도 인간과 쌍무계약으로 맺어진 거지. 사막에서 우리의 임무를, 역할을 생각해 보면 그건 명백한 거야.

그런데 우리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특히 골절이 문제인데 극심한 통증이 오고 혈압이 오르면서 모세혈관이 터져 피가 흘러 죽는 거야. 우린 딱딱한 바닥을 걷게 되면 발굽에 염증이 생겨서 다리뼈가 전부 내려앉을 수도 있고, 그뿐만이 아니야, 한번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나면 온몸의 관절과 근육, 뼈와 속 내장이 상하는 부상을 입을 수도 있지, 그러다 잘못하면 죽는 거지. 그러나 인간들은 우리들의 부상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거야. 부상당해 못쓰게 되면 잡아먹으면 그만이라는 거지. 우리가 죽으면 살코기와 가죽을 남기게 되거든. 그리고 인간들은 그 기회에 포식하는 거야.

인간들은 위선자인 거지. 자신들이 죽으면 여우나 승냥이가 먹지 못하도록 땅속 깊숙이 매장을 하는 거야. 예수님이 죽었을 때도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그를 돌무덤 속에 숨겨 놓은 거야. 짐승들이 뜯어 먹지 못하게 말이지. 그러고 나서 예수는 부활할 수 있었거든.

그런데 말이지 우린 만날, 허구한 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거든. 우리도 매일 같이 물을 실컷 마시고 배부르게 먹으면 좋은 거야. 물은 귀중한 것이지. 생명줄인 거야. 인간도 동물도, 나비도 벌도, 꽃과 나무도 공기만큼 물이 필요하지. 물이 없으면 이 세상은 흙과 돌멩이만 남게 될 것이지.

그러나 인간들은 우리가 목마르다는 것도 배고프다는 사실도 자꾸 잊어버리는 거야. 자신들이 우선인 거지. 인간만이 유일하고 고유하다고 믿는 거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게 맞는 거야. 인간 동물이 그렇게도 우월한 존재라고 장담할 수 있는 거야. 인간들 역시 이 지구를 거쳐 간 수많은 동물 종 중 하나일 뿐인 거, 알고 있는 거야. 인간이란 종의 동물 역시 별 수 없을 거야. 인간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도 그 탐욕과 폭력성 때문에 언젠가는 아무런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우리에게도 동물적인 감각과 감정이 있는 거야. 인간은 동물에게 ‘동물들은 이성적일 수 있는가?’ 또는 ‘그들도 말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동물들은 고통 받을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만 하는 거지. 그런데 인간들이 낙타의 냄새가 지독하다고 느끼는 것보다도 낙타는 인간의 냄새가 더 심한 악취로 느껴지는 거야. 정말 보기 싫은 인간들을 우린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지. 그런 인간에게는 독한 침을 뱉어 주거나, 정말 미운 놈은 뼈가 으스러지게 뒷발로 냅다 걷어 차버리지. 그리고 가끔 주인과 무슨 일로 감정이 상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기도 하는 거야.

그러나 우린 인간에게 오직 착취만 당했던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겠어. 난 지금부터 은퇴하고 싶어. 강가의 가장 좋은 풀밭을 골라 풀을 뜯고 엉덩이를 지긋하게 깔고 앉아 지난날들을 되새김질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 거야. 더 이상 위험한 모험 따위는 하고 싶지 않지. 내 나이를 생각해봐. 그런데 우리 주인이 이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난 팔려가는 늙은 노예 신세가 되긴 싫거든.”

 

사막에서는 악령의 소리가 들렸다.

부드러운 모래 속에 푹 파묻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만큼 아름다운 사막의 심장부에서 끊임없이 그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소리에 홀리게 되면 길을 잃고 죽게 될 것이다. 나는 ‘들어가면 결코 나오지 못한다.’는 또는 ‘죽음의 바다’인 그 사막의 심장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사막의 중심부에는 사하라와는 달리 어떤 동식물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하늘에 나는 새 없고 땅에는 뛰는 짐승이 없다. 멀리 아무리 보아도 눈 닿는 데 없고, 갈 곳을 알지 못한다. 사막의 풍경은 가히 초현실적이다. 그곳이 타클라마칸 사막이었다.

끝도 없이 평평하게 이어진 그 길은 모래와 자갈로 뒤덮여 있었고, 가끔 사막 식물인 갈색 타마리스크 덤불이나 낙타가시풀만이 흩어져 있었으며,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모래언덕은 텅 빈 하늘을 배경으로 예리한 칼날 같은 황금빛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태양은 불볕처럼 내리 꽂았고, 사막은 점점 보랏빛으로 변하며 대지에는 아지랑이가 피워 올랐다. 때로는 사막 쪽에서 불어오는 거센 북풍이 분말 같은 모래가루를 몰고 와서 시야를 가리고 햇빛을 차단하였다. 모래가 미친 듯이 빙글빙글 춤을 추며 사막을 온통 휘저었다. 그럴 때는 강렬한 모래바람에 맞서기 위해 단단히 무장을 해야 했다. 엷은 터번으로 머리와 얼굴을 몇 겹으로 꽁꽁 싸매고 안경으로 눈을 보호하였다.

사막의 태양은 아침 6시에 정확히 떠올라서 정오 1시쯤이 되면 정점에 달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지독한 열기를 내뿜다가 5시부터서야 조금 선선해졌고 저녁 7시가 되면 황금빛 저녁노을 속에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우리는 주로 아침나절과 저녁에만 걸을 수 있었다. 느긋한 심정으로 별로 빠르지 않게 걷는다. 나는 황홀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흙먼지로 뒤범벅이 되고 땀에 절어 흐느적거리는 지친 몸을 겨우 지탱하면서 걸었다. 다리가 납덩이를 달고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메마른 공기가 내 목을 조였다. 숨이 턱턱 막힌다. 시간은 정지한 것 같다. 광대한 대지가 나를 향해 유혹의 눈짓을 보냈지만 사막을 걸어서 건너는 일은 너무 고통스럽다.

 

가끔 진흙 벽돌로 지은 두세 채의 작은 집들이 허허벌판 속에서 나타났다. 식당이거나 음료수, 담배, 수박 등을 파는 구멍가게였다. 가게 안은 거친 나무 선반으로 조잡하게 만든 진열장, 한 두 개의 더러운 원탁 테이블이 있었고, 바닥에는 모래가 두텁게 덮여 있었으며, 벽에 페인트칠을 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가게 안 이곳저곳에 너무나 많은 말파리들이 윙윙대며 날아다녔다.

한때 당당했던 대상의 숙소이었던 건물은 지금은 퇴락해서 흙벽돌이 허물어져 앙상한 잔해만 남아 있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그 길로 낡은 트럭이 펑크족의 머리처럼 짐을 잔뜩 싣고 매연과 굉음을 뿜어대며 지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도로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눈을 가만히 감고 조각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던 낙타의 목에 매달린 종이 딸랑딸랑 가냘프게 울렸다.

그 길은 그 무시무시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우회하기 위하여 그 사막의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길 가운데 남쪽 길이었고, 이 길을 지나 서쪽으로 나아가면 산봉우리에 만년설을 이고 있는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여 중앙아시아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북쪽 길로 가면 톈산산맥을 넘어서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루트를 거쳐 시베리아 남쪽의 대초원 지대를 동서로 연결하는 초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 길에는 과거의 남루한 흔적들이 현대의 문명과 함께 공존한다. 그 오지에서는 그 작은 길만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이었다. 그 길에는 아직도 대상에 대한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다. 그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 길을 지나면서 흔적을 남긴 대상들에게 깊은 연대의식을 느꼈다.

중국의 시안에서 시작하여 동부 지중해까지 복잡하게 얽혀서 뻗어 있는 고대 실크로드의 한 갈림길이었다. (그러나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19세기에 이르러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하였다. 비단길은 단 한 번도 지리학적으로 확정된 길이 없었다. 그 길은 중앙아시아의 대평원 여기저기로 뻗어나간 수많은 샛길들을 만들어져 있었다.)

1,300여 년 전에 이미 신라 승려 혜초는 이 길을 걸었고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해외 여행기라고 할 수 있는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문명 탐험가였다.

그 길을 천 년이 넘게 대상들이 왕래하였다. 지금도 그 황량한 길에는 오랜 여행에 지친 대상들의 머나 먼 고향에 대한 향수가 묻어있었고, 그들의 장탄식이 들리는 듯하였다. 대상들은 극심한 여행의 피로를 풀기 위해 담배처럼 파이프로 피우는 아편인 타리야크의 흰 연기를 들어 마시고 몽롱한 꿈에 취하여 고향과 가족들을 몹시 그리워했을 것이다.

대담하고 강인한 여행자였던 혜초 역시 그 억센 향수병을 어쩌지 못하였다. 긴 여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을 때, 만삭의 달이 이즈러가는 밤에 한줄기 거센 바람에 흩날려 떠나가는 구름을 보면 저절로 치미는 향수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 위대한 여행기에 죽음의 공포와 허기, 고통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향을 절절히 그리는 이 시를 남겼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 /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보지만 /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들리지 않는구나 /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는데 / 남의 나라 땅끝 서쪽에 있네 /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우리는 처음에는 서로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갖가지 얼굴 표정과 손짓발짓, 몸짓으로 의사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카심은 중국말을 반쯤 섞어서 투르크계 언어인 위구르어로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단조롭게 말했고, 나는 중국어에는 능통한 편이었지만 서툰 위구르어로 말했으니까. 내가 외우고 간 몇몇 위구르어 단어는 금방 밑천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며칠간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끊임없이 수다를 떨고 가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나중에는 함께 오랫동안 여행을 해서 서로 언어가 통하기 시작했고 완벽하게 감정이입을 하였기 때문인지 마음의 언어로 대화를 하여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여행으로 몹시 피로하고 지쳐있는 상태에서도 둘은 늘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나저나 매일 그날의 여정이 끝나면 그와 함께 양고기 꼬치구이인 시시케밥 또는 불에 잘 구운 도마뱀을 안주로 하여 목구멍이 짜릿하게 타들어가는 독한 고량주를 마시는 기분만큼은 그만이었다. 독주의 마법 같은 온기가 지친 육체 속으로 퍼지면서 다시금 기운을 차리게 하였다. 그것은 마약처럼 그날의 고통을 지워주었다. 그것이 피로하고 지친 우리의 영혼을 달래주었다. 그 생명의 물 때문에 우리는 그 고달프고 지루한 여행을 즐겁게 끝낼 수 있었다.

낙타몰이꾼은 진정한 무슬림이었다. 황금빛과 핏빛으로 물든 사막의 저녁놀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면, 매일 그때마다 그는 메카가 있는 서쪽을 향해 기도 하였다.

“알라는 하나님이시다! 알라만이 하나님이시다! 알라는 살아계신다. 신은 위대하다……. 그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는 우리의 삶뿐이다. 우리가 죽고 우리가 살고 오직 알 다흐르 (시간)만이 우리를 파괴할 수 있을 뿐이다.’ 야 랍비 (오 주여)…… 야 알라 (오 하나님)…….”

그러나 그는 교리를 어기고 술을 마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웠다.

내가 비아냥거렸다. “매일 밤, 그렇게 술을 마셔대면서……. 기도는 무슨……. 그건 경전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짓이야. 알라가 알게 되면 크게 화를 낼 것 아냐?”

“나는 기도를 해야만 하지. 정성껏…….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언가 나쁜 일이 금세 일어날 것만 같거든.”

카심이 그립다.

그는 얼굴에 검은 턱수염이 무성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둥글둥글하고 포근한 인상을 주었다. 목소리는 나직하고 따뜻했다. 언제나 변함없이 순박하고, 맑고, 평화스러웠다. 그러나 사람을 꿰뚫어보고 마음을 휘어잡는 깊은 눈매를 가지고 있다. 그는 사막을 경외하였고 낙타를 자식처럼 아꼈다. 평생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낙타와 함께 살다가 운명처럼 조용히 죽을 사람이었다.

그 여정이 끝나고 헤어질 때 카심은 감정이 북받친 것 같았다. 우리는 묵묵히 눈빛으로 서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고, 침묵 속에서 가슴으로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 작별 인사는 오래 걸렸다.

“반드시…… 다시 올 겁니다. 그때……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년에 걸쳐서 시베리아 남쪽 초원의 길을 걸을 작정입니다. 걷는 게 좋거든요. 그리고 낙타들을 꼭 다시 보고 싶군요. 그들은 인간 이상이라고……. 어르신, 부디 건강하십시오.”

나는 슬펐지만 오랫동안 꼭 쥐고 있던 카심의 손을 놓고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올 것이라는 그 약속을 꼭 지켜야 하리라.

그리고 그때 가족처럼 정들었던 낙타와 헤어지는 것도 정말이지 고통스러웠다. 나는 여행 동안 무거운 짐을 나르는 자신의 의무를 묵묵히 수행했던 낙타를 여행의 동반자, 동료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오렌지나 다른 과일을 먹을 때는 꼭 반씩 나눠서 낙타들에게 줬던 것이다. 그때마다 낙타들은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낙타들은 비록 동물이지만 독특한 우아함을 지니고 있다. 헤어질 때 다시 보니 그 낙타들은 오랜 여행에 다소 지친 듯 여윈 것처럼 보였다. 나는 보드랍고 따끔따끔한 털로 덮인 낙타의 목덜미와 등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나 호탄에게는 작별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호탄을 사랑했던가? 낙타가 온갖 감각과 함께 영혼을 가지고 있고 살아있는 생명의 그릇으로 아름답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한없이 따뜻하고 보드라운 잔등을 육감적으로 쓰다듬고 애무하면서 손가락 끝에서 인간적인 숨결을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던가. 내가 그날 밤 지혜의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공감하며 감동을 느꼈던가.

다만 의례적이긴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건강해야지. 건강…….” 늙은 낙타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녀가 편안한 임종을 맞고 영면할 수 있을 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다른 낙타들처럼 예정된 순서에 따르게 되지 않겠는가. 나는 그 불쌍한 짐승의 머리와 귀, 코, 입을 쓰다듬어 주는 것 이외에 속수무책이었다. 호탄은 한결 느긋해져서 두 줄의 촘촘한 속눈썹을 껌벅이며 그 지독한 냄새가 번지는 혀를 쭉 내밀고 나의 손을 오랫동안 핥았다. 나름의 이별 인사였다.

카심은 그 자식 같은 낙타를 데리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나는 돌아서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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