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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모서리
장 정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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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온몸을 움츠린 채 불안한 눈동자를 굴리며 거리를 걷고 있다. 땟국에 절은 후줄근한 외투 깃 사이로 드러난 여자의 얼굴이 시린 바람 속에서 푸르뎅뎅하다. 먼지에 누덕진 머리칼이 어지럽게 시야를 가리는데도 여자는 어떻게 해볼 요량도 없이 허청대며 걸어갈 뿐이다. 여자는 이따금 눈물을 찍어내듯 더럽고 까칠한 손으로 눈두덩을 문질러댔다. 그럴수록 여자의 퀭한 눈자위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여자는 며칠째 거리를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생채기가 생긴 발가락마다 진물이 흘러나왔고, 이내 굳은 자리가 뜯기면서 다시 피가 배어났다. 느릿느릿 발을 내디딜 때마다 잔뜩 일그러뜨린 여자의 입술에서 짧은 비명이 새어나왔지만, 여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차츰 사위가 먹빛으로 어두워지더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얼굴에 스치는 차가운 기척을 느끼고는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악마들이야. 외계인들이 나를 잡으러 오고 있어!”
여자는 경황없는 몸짓으로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더니 황급히 지하도 계단을 뒤뚱거리며 내려갔다. 구석으로 몸을 피한 여자는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는 행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숨어. 빨리 숨으라니까!”
이따금 행인들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나쳐갈 뿐, 여자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입술에 손을 댄 채 행인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주절거렸다.
“쉿, 절대 말하면 안 돼. 저들은 악마의 첩자들이야! 우리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내려오는 외계인들이거든.”
여자는 지하도 구석에 웅크린 채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말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여자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미간이 흐려지며 눈이 게슴츠레해진 여자는 쏟아지는 잠을 털어내려고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자면 안 돼, 외계인들이 잡아간다고.”
여자는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럼에도 점점 내려앉는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한 여자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우우우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던 여자가 갑자기 쓰레기통 옆에 세워둔 비닐봉지를 와락 껴안았다.
“내 가방이야. 돈도 많이 들었다구!”
그 바람에 봉지가 찢어지면서 오물이 쏟아졌다. 별의별 쓰레기와 과일 껍질, 라면 국물 등이 여자의 앞섶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여자는 낚아챌 듯 비닐봉지를 등 뒤로 숨기더니 행인들을 노려보았다.
“뺏어가지 마!”
여자의 꼿꼿한 눈빛이 금세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여자는 지하도 벽면에 숨은 사방의 적들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기라도 하는 듯 뒷걸음치더니, 돌연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을 딛고 지상에 올라선 여자는 아랫도리를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피가 흐르는 발가락도 발가락이지만, 여자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사타구니였다. 오랫동안 속옷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못한 샅에 오물이 딱지처럼 굳어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을 벼리듯 쓰라려왔던 것이다. 여자는 미간을 좁힌 채 엉거주춤한 몸짓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여자는 편의점을 향해 다리를 끌며 걸어갔다. 유리창에 바짝 달라붙어 컵라면을 먹고 있던 사내아이 둘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를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물건이 놓인 선반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여자는 냉장고 안에서 막 음료수병을 꺼내들던 긴 생머리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나, 팬티 사줘.”
무심코 고개를 돌린 생머리가 어맛!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여자는 절박한 눈빛으로 생머리에게 바투 다가서며 애걸했다.
“나 아퍼, 팬티 사줘, 응?”
그러자 카운터에 서 있던 청년이 황급히 달려와 여자를 편의점 밖으로 끌어냈다. 여자는 안간힘을 쓰며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 청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경광등을 단 경찰차가 편의점 앞에 멈추어 섰다. 구경꾼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리문 손잡이를 잡고 앙버팀을 하고 있던 여자가 끌려 나왔다.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소동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제 길을 찾아 흩어지는 동안, 여자를 태운 경찰차는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
거기 누구 있어요? 누구든 내 이야기 좀 들어줘요.
*
지선은 TV 앞에 앉아 있었다. 연이은 야근으로 지친 몸이 바닥에 들러붙듯 축 늘어졌다. 습관처럼 켜놓은 심야뉴스에서는 죽은 지 며칠 된 여인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미수가 집을 나갔어요. 열흘도 넘었고요.”
미수 남편의 불안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건너왔다. 그는 뉴스에서 변사체 소식을 접한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원 확인을 하러 다녀왔다고 했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좋으니 어서 상황이 종료되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어요. 어디서 뛰어내려 버리든지, 교통사고라도 나든지…….”
불현듯 그를 향해 전화기를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차라리 그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지선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지선의 침묵이 불편했던지 그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듯 넋두리를 했다.
“오죽하면 이러겠어요. 처음도 아니고…….”
그는 지선이 미수의 부침(浮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걸러지지 않는 자신의 속마음까지 받아 주리라고 생각한 것은 뻔뻔한 일이었다.
“위치 추적을 해보니 터미널 부근에서 끊기더라고요. 행여나 싶어 그쪽 부근 찜질방까지 다 찾아다녀봤지만…….”
혀를 내차듯 그의 말꼬리가 스러졌다. 지선은 감겨드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며 그에게 물었다.
“그동안 미수의 행동에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뭔 소린지 자꾸 이사를 가자고 했어요. 우리가 무슨 돈이 있어 이사를 가겠냐고 했더니, 화를 내더군요. 생각해봐요. 말이나 되느냔 말이에요. 돈 번다고 나가서 일만 벌이더니, 결국 집안 살림 다 거덜내놓은 당사자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되는지 모르겠어요. 애들이 셋이나 되니 그나마도 녹록치 않은 판인데…….”
이 남자의 어투는 늘 이랬다. 누군가를 탓하는 버릇은 죽는 순간까지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선은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리모컨을 집어 TV를 껐다.
“세 아이를 먹이고 키운 사람은 미수였어요.”
“그런 말 마시요. 건강식품 취급하다가 엎어먹고, 화장품 판매하면서 생긴 빚이 얼만지 알아요? 본인이 다 털어먹고도 누구더러 무섭다고, 이 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냔 말이에요. 사글세로 겨우 붙어 있는 판인데…….”
“그 사글세도 모두 미수가 번 돈이에요.”
그는 움찔하듯 잠깐 사이를 끊었다. 그는 돈이 사람을 망친다는 지론을 가진 사람이었다. 물질은 목숨부지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입만 열면 세상 사람들의 속물성을 한탄했다. 날로 피폐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 가난해지는 것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열변했다. 그는 종종 불만스러운 세상에 항거하듯 출가를 빙자해 가출을 감행했다. 그렇게 가족을 내버려둔 그가 미수의 부재 앞에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단 말인가. 지선은 그의 표변이 참으로 낯설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큰일이요. 또 발병을 했다면 이번이 세 번짼데…….”
지선은 욕지기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혹…… 소식이 닿으면 연락주시요. 나를 만나기 전부터 친구였고, 가장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왔던 사이 아니요?”
그가 목소리를 낮추는 순간, 지선은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듯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오랫동안 당신을 버텨주느라 밑동이 닳아버린 미수를, 이제는 당신이 버텨줘야 할 때가 온 거예요. 그것이야말로 미수에 대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예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전화를 끊었다. 그의 침묵은 오히려 무거운 사슬이 되어 지선의 가슴을 짓눌렀다. 지선은 지그시 명치를 누르며 창가로 다가갔다. 어둠이 검은 물결처럼 베란다 앞까지 밀려와 있었다.
그러는 나는 뭔가. 미수 남편에게 따져 물을 만큼 친구로서 인간으로서 예의를 다했는가. 항상 내게 안부를 먼저 물었던 것도 미수였고, 만나고 싶다며 달려온 사람도 미수 아니었나. 주말 부부교사로 떨어져 지내는 남편을 대신해 두 아이를 뒷바라지하며 집안일과 학교일에 치여 사느라 한 번도 미수를 먼저 찾은 적이 없던 내가 아니었나.
지선은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므로 누구도 지선에게 먼저 시간을 내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미수가 지선을 만나러 오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도시의 북쪽에서 남쪽을 가로질러야 하는 수고를 기울여야 했음에도, 지선은 ‘시간 있는 사람은 언제나 너’라는 말로 당위성까지 부여했다. 그럼에도 미수는 항상 반가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얼굴로 지선 앞에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미수의 어깨에는 보험 전단지나 화장품, 건강식품이 든 커다란 가방이 들려져 있곤 했다.
미수는 가방의 무게로 한쪽 어깨를 잔뜩 치켜세운 채 눈가를 동그랗게 모으며 웃었다. 까칠해진 눈자위에 잔주름이 그득했다. 부쩍 피폐해진 얼굴이었다. 지선은 교정의 벤치에 앉아 미수의 가방 안에 들어 있던 화장품이나 건강식품을 집어 들었다.
“얼굴이 안 좋구나. 어디 아프니?”
“막아야 할 돈이 많은데…… 방법이 없어. 이제는 형제들한테도 낯이 없고.”
말꼬리를 흐리며 미수는 겸연쩍게 웃어보였다.
“남편은 아직도 벌이가 없니?”
“며칠 바람 쐬고 온다며 지리산에 갔어. 집에 있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대.”
“오호? 천하를 주유하는 자유로운 영혼께서 집을 나섰다구?”
지선이 비아냥대며 목소리를 높이자, 미수는 고개를 흔들며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지 마. 나름의 이상과 철학을 가졌던 사람인데…… 현실이 못 받쳐주는 거지. 그러니 본인은 얼마나 더 힘들겠냐.”
지선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흘겨보자 미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가난해서 그렇지, 우리는 돈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어.”
가끔 지선은 미리 준비한 현금봉투를 미수의 가방 안에 넣어주곤 했다. 번번이 시간을 내주지 못한 죄책감을 터무니없이 부족한 종잇장들로 대속하는 기분이었지만, 미수를 위해 지선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망연한 눈빛으로 가방을 내려다보던 미수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에도 네가 쌀을 대줬잖아. 오래돼서 벌레가 생겼어도 끝까지 다 먹었어. 한 톨도 안 버리고 말이야. 아까워서…….”
지선은 손사래를 치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손을 흔들며 돌아서는 지선을 미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지선이 건물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에야 미수는 쓸쓸한 등허리를 내보이며 돌아섰다.
미수의 부재를 접하고 나서야 지선은 깨닫는다. 미수를 만나러 가지 못할 만큼 바빴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음을. 미수가 자신을 만나러오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만남은 지금껏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미수를 도와주는 한편 미수를 간섭했고, 간섭한 만큼 미수의 마음에 상처를 안겼고, 미수의 불행에 발목마저 잡히게 될까봐 두려웠다. 어쩌면 지선은 지폐 몇 장을 방패삼아 자신에게 번질지도 모를 미수의 불운을 차단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언제였던가. 캄캄한 어둠 속, 휴대폰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지선은 머리맡을 더듬어 폴더를 열었다.
‘지선아, 사랑해!’
미수에게서 온 문자였다. 새벽 4시. 잠은 순식간에 달아나고 말았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곧장 미수에게 전화를 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세상을 다녀가는 자의 마지막 모스 부호 같은 느낌이었다. 전화 받아. 제발……. 어쩌면 미수는 허공으로 몸을 날리기 위해 발을 내딛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지선은 불안하고도 초조한 마음으로 연이어 통화를 시도했다. 자신에게 남겨진 미수의 모든 것, 늘 먼저 건넸던 따뜻한 안부, 따뜻한 미소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황황히 옷을 챙겨 입었다.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은 화급함 때문이었다. 턱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팔이 소매통을 찾지 못해 허둥거리는 동안, 지선은 발작적으로 전화버튼을 눌러댔다. 한참 후에야 미수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지선의 목소리는 조급하고도 높았다.
“잠자다가 깼어. 잠이 안 와 멍하니 앉아 있는데…… 네 생각이 났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그 순간, 지선은 어둠 속에서 문자를 보내고 있었을 미수의 웅크린 모습을 떠올렸다.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 나중에 못하게 될까봐…….”
“그럼, 왜 전화는 안 받았어?”
“화장실 다녀왔거든.”
큭큭큭.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정겨웠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볼 살이 도톰하고 피부가 하얬던 미수는 읍내 유일의 주유소집 딸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아이들 모두 양은도시락에 든 찬밥덩이를 입에 몰아넣고 있을 때, 미수는 보온도시락에 든 따뜻한 밥을 꺼내먹었다. 행상인의 딸이었던 지선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찬밥을 씹으면서 미수의 도시락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지선의 눈빛을 알아챘던가. 미수는 바꿔 먹자며 지선의 도시락을 빼앗듯 가져갔다. 네모반듯한 양은도시락에 담긴 찬밥을 젓가락으로 4등분, 8등분 나누어 입 안 가득 몰아넣으며 즐거워했다. 미수는 자신의 보온도시락을 자주 지선에게 내밀었고, 따뜻한 밥은 부드럽게 내장을 쓰다듬으며 외롭고 쓸쓸한 지선의 유년을 위로했다.
고교 시절부터 시작된 도시 유학생활은 어땠는가. 도시의 길은 미로처럼 어지러웠고, 지선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막막함과 불안에 날마다 길을 잃었다. 마땅히 기댈 곳을 갖지 못한 지선이 미수의 자취방으로 찾아들 때마다, 미수는 따뜻한 미소로 찬바람이 할퀸 지선을 맞아주었다. 지선은 품에 안았던 책을 놓기도 전에 이불 속으로 시린 발부터 밀어 넣었다.
“오늘은 콩나물밥 해먹자.”
미수는 뿌리를 다듬고 깍지를 골라낸 콩나물을 잘 씻어 쌀과 함께 골고루 섞었다. 콩나물밥을 지어보기는커녕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던 지선의 경이로운 눈빛을 받으며, 미수는 엄마처럼 자랑스럽게 말했다.
“콩나물밥은 보통 때처럼 물을 넣으면 질게 돼. 콩나물에서 물이 빠지거든.”
냄비를 연탄 화덕에 올려놓은 미수는 익숙한 솜씨로 간장에 통깨를 넣고 마늘을 다져넣은 다음, 파를 송송 썰어 넣어 양념장을 만들었다. 통깨와 파가 잘 버무려진 양념장은 초원에 핀 자잘한 꽃처럼 예뻤다. 화덕의 밥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키득거렸다. 방바닥의 따뜻한 기운에 온몸이 눅진해지며 정신이 몽롱해질 무렵, 미수는 쟁반에 냄비와 양념장과 밥그릇을 챙겨왔다. 미수는 사기그릇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며 주걱으로 밥을 옮겨 담았다. 지선은 포실포실한 콩나물밥에 양념장을 끼얹어 달게 비벼먹었다. 미수는 곧 그릇을 챙겨들고 부엌으로 나갔고, 지선은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길고 긴 단잠에 빠져들었다. 설거지하는 미수의 그릇 부딪는 소리가 귓속을 들락거리다가 아련히 멀어졌다.
어느 날, 지선은 미수의 방바닥에서 한 장의 메모지를 주운 적이 있었다. 무심코 빼낸 책을 뒤적이다가 화르르 떨어져 내린 종이였다. 반으로 단정히 접힌 메모지에는, 미수가 옮겨 적었을 법한 몇 줄의 문장이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돌이켜보면 늘 그렇다. 세상에는 일정량의 재화가 있어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듯, 일정량의 행복을 제각기 나누어 누린다는 생각이다. 누군가 밥술이나 먹고 안정된 영혼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세상의 바람을 막아내는 병풍 같은 존재들의 덕일 것이다. 내가 겪을 바람을 네가 대신 막아주고 있다는 느낌. 이럴 때 나는 이들에게 늘 빚진 존재가 된다.’
가슴이 먹먹해진 지선은 메모지를 자신의 책 속에 집어넣었다.
젊음이 화르르 날리는 벚꽃처럼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지금, 그 메모지 또한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미수가 철학과 대학원생과 연애를 시작했고, 지선 또한 그렇고 그런 몇 번의 연애와 이별을 거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멀어졌다. 미수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신규교사로 부임한 지선이 지금의 남편을 만나 막 연애에 빠져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미수를 생각할 때마다 드리워지는 부채의식은 어쩌면 그 시절의 메모지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겪을 바람을 네가 대신 막아주고 있다는 느낌.’ 지선은 미수의 바람막이 안에서 유년과 젊음이 온전히 쉴 수 있었고, 지금 미수의 고통 또한 자신의 고통을 대신해 짐 진 십자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미수와 나눌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돈 몇 푼뿐이라는 자괴감이 지선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
“도를 아십니까.”
힐끔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남자 하나가 여자의 곁에 다가서며 낮게 속삭인다.
주말 인파가 붐비는 백화점 앞 횡단보도. 도로에 나뒹굴던 은행잎들이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 찰싹 들러붙었다. 가뭇없이 떨어진 기온에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층 두툼해졌고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몸을 움츠린 채 종종거리는 사람들 속에 유독 얇은 옷차림의 여자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추위 탓인지 여자의 얼굴이 창백하다.
“많이 힘드시겠군요. 앞길이 안개에 가려 좀처럼 보이질 않겠습니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한동안 물끄러미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
“혼자 헤쳐 나가기가 어려우실 텐데,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남자가 앞장을 서자 여자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의 뒤를 따라간다. 언덕배기 골목을 미로처럼 돌고 돌아 찾아간 곳은 굿당. 이토록 힘든 세상을 어떻게 버텨왔느냐는 무당의 말에 여자는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다. 여자는 자신의 손을 힘껏 부여잡은 무당에게 통장에 든 잔금을 찾아 모두 건넨다.
“걱정 마시고 정한 날짜에 오세요. 틀림없습니다.”
하아……! 골목을 돌아 나오며 여자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쉰다. 미열에 달뜬 여자의 얼굴에서 안도감이 배어난다. 배시시 입술을 깨물며 웃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찬바람이 여자의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스치고 달아난다. 얼굴의 열기가 서서히 식으면서 불현듯 여자는 남은 돈을 다 써버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여자는 돈을 어디다 써버렸냐며 채근할 남편이 두렵다. 갑자기 세상 속에 알몸으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돌연, 여자는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한다. 마음이 걸음을 앞질러 가는지 두 다리가 뒤엉켜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만 같다. 안 돼……! 여자는 낮게 부르짖으며 뛰다시피 걸음을 놓는다. 마침내 언덕배기 골목으로 접어든다. 좁디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엉켜 있다. 여자는 미친 듯 기웃거리며 여기저기 골목을 되짚어보지만, 여자가 찾는 굿당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린 여자는 그만 망연자실, 그 자리에 멈춰서버린다. 그러자 주변의 건물들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더니 검은 판장이 되어 여자를 덮쳐누르기 시작한다. 거리를 걸어가던 사람들이 일시에 까만 개미떼가 되어 자신의 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다. 여자는 미친 듯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개미떼들을 털어댄다.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모른다. 숨을 헐떡이며 부엌에서 물을 들이켜고 있는 순간, 여자의 귓속으로 위잉, 냉장고 기계음이 파고든다. 여자는 돈을 다 써버린 것을 안 외계인들이 자신을 잡아가기 위해 집 안에까지 침범해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황급히 달려가 창문을 닫아걸고 커튼을 친다. 그러자 밥솥에서 치익, 소리가 들린다. 우주선이 연결되어 교신을 하고 있는 소리다. 두려움과 공포로 숨을 곳을 찾던 여자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근다.
그 서슬에 방에서 나온 막내아이가 화장실에 들어간 엄마를 부르며 울기 시작한다. 이어 남편이 나오고 큰아이, 둘째아이 모두 나와 화장실 문을 두드린다. 큰소리로 여자를 불러대던 남편이 안방에 들어가 연장을 꺼내온다. 그는 이를 앙다물며 화장실 문을 강제로 열어젖힌다. 문이 열리자 여자는 푸르게 질린 얼굴로 서서 오줌을 저리고 있다. 여자는 거친 몸짓으로 자신을 끌어내려는 남편의 팔을 이빨로 물어버린다. 비명을 지르며 팔을 움켜잡던 남편이 여자를 밀쳐내자, 여자는 화장실 바닥으로 넘어지며 욕조에 머리를 부딪친다.
“엄마! 엄마!”
우는 아이들을 향해 힘없이 눈을 뜬 여자의 머리에서 피가 흐른다. 여자는 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기 위해 허공을 휘젓는다.
*
푸른 하늘, 따스한 햇살. 일요일 아침이었다.
지선은 모처럼 주어진 여유를 만끽하며 햇살 가득 쏟아지는 유리창 곁에 다가섰다. 아파트 주차장에 늘어선 나무들마다 단풍들의 향연이 한창이었다. 엊그제 내린 가을비로 바람 끝이 한층 날렵해졌으련만, 유리창 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그저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다. 햇살에 등을 내맡긴 채 비몽사몽 꿈결에 젖어들기 좋은 아침, 미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보고 싶어…….”
단 두 마디. 미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지내? 어디야? 뭐해? 만나서 점심이나 먹을까?”
여전한 침묵. 지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긴 숨을 몰아쉬더니 미수가 입을 열었다.
“네가 와. 나 버스 못 타.”
툭툭 내뱉는 단절음. 말투가 평소 같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보고 싶어.”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동안, 자동차 속력은 턱없이 높아졌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햇빛을 받아 금가루처럼 쏟아져 내렸다. 세상은 이렇듯 찬연한데…… 붉디붉은 단풍잎은 피를 토하듯 뚝뚝 떨어졌다.
미수는 시립도서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지선을 보고도 어깨 너머의 낯선 사람을 보는 양 그저 망연히 바라볼 뿐 미동도 없었다. 낮게 가라앉은 눈빛에 깊은 우울이 드리워져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지선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미수의 손을 잡아끌고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검불처럼 가녀린 손목이 맥없이 끌려왔다. 식당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미수는 가슴을 구부정하게 오그린 채 지선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뒤통수에 하얀 상장(喪章)처럼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머리가 왜 그래? 다쳤니?”
“외계인이 들어왔다 나간 자리야.”
지선은 눈을 치켜떴다. 미수는 지선을 향해 상체를 쑥 내밀고는 낮게 속삭였다.
“곧 전쟁이 일어난다. 외계인들이 온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지금 피하지 않으면 너도 당하고 만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지선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애써 흔연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보고 싶다더니, 그걸 말해주려고?”
그러자 미수는 두려운 눈빛으로 입술에 손을 댔다.
“쉿! 큰소리로 말하지 마. 외계의 첩자들이 듣고 있어.”
미수의 얼굴은 초췌했다.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해 피로에 지친 눈자위 아래로 볼이 탄력 없이 늘어져 있었다. 지선은 몸과 마음이 서늘해져 자꾸 팔을 쓰다듬었다. 지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간파했을까, 미수는 집요한 목소리로 지선에게 속삭였다.
“너, 내 말 안 믿는구나?”
지선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냐, 믿어, 무조건 다 믿어.”
“말만 그렇지, 넌 지금 내 말을 믿지 않아.”
미수는 밥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유심히 지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눈빛이 의혹과 의심으로 출렁이는 지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지선은 혼자 미수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다. 누군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지선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미수를 다독였다.
“어서 밥 먹어. 먹고 나서 이야기하자.”
마지못해 수저를 들지만, 미수는 밥 먹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지선 또한 그런 미수를 앞에 두고 식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밥 먹는 시늉만 하다가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로 진주를 불러냈다. 진주는 미수와 함께하는 모임의 멤버였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오니 미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선이 앉자마자 고개를 들고 다시 말을 건넸다.
“지금 말은 모두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내 안에 하느님이 계셔. 하느님이 내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내 말을 믿어야 해, 알았지?”
미수는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진주가 왔으면 좋겠다. 지선은 그때까지는 최대한 따뜻하고 다정하게 미수를 대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 무조건 나는 네 말을 다 믿어. 하느님이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니까. 그러니 너를 선택하여 하느님 말씀을 전하시는 거겠지.”
그러자 사위를 경계하던 미수의 눈빛이 한층 누그러졌다.
“세상에 아무도 내 말을 믿는 사람이 없어. 남편도, 아이들도…….”
지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미수는 편안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 아파.”
“어디? 병원에 가서 진찰해봤어?”
“응. 검사 결과로는 아무 이상이 없대. 나는 이렇게 아픈데…… 외계인들이 내 몸을 수시로 드나들고 있는데도 그걸 몰라. 한 번씩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옆구리가 터질 것처럼 아픈데,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데……. 정신과에 가보라는 말이나 하고.”
그렇게 미수는 일자리를 잃었다. 보습학원 아이들이 수상한 얼굴로 쉬쉬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원장에게 전화를 한 학부모는 낮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을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겠다고.
이윽고 진주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선은 반가운 듯 진주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돌아보던 미수의 움찔하던 몸짓을, 지선은 놓치지 않았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추스르듯 곧추세우던 미수의 눈빛을, 다치기 쉬운 여리고 내밀한 속살을 내보이지 않겠다는 무장한 자의 갑옷을, 그 속으로 숨어버린 미수를.
*
지선은 겨울방학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던 수업으로 인해 미수를 잊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날마다 오르내리는 일상 속에서 미수는 이 빠진 계단 하나였다. 두 다리를 벌려 건너뛰어야 하는 순간이 매번 반복되었지만, 그 황량하고 불안한 실종 앞에 그저 속수무책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선은 기적처럼 미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앙상한 겨울 가지 사이로 부연 봄 안개가 서리기 시작하던 2월의 초입이었다.
“잘 지냈니?”
전화 속 미수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아침에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흔연스러워 환청인가 싶었다.
“바로 전화하지 못해 미안해. 일자리를 구하느라고 늦었어.”
서울 외곽에 있는 병원에 있었다고 했다. 무사귀가를 확인한 순간, 울화가 솟구치는 이 아이러니는 뭔가. 지선은 냉정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돌아왔으니 됐다. 이만 끊자!”
“지선아, 잠깐만!”
미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지선을 붙잡았다.
“만나서 애기하자. 할 말이 많아…….”
지선은 책상 가득 늘어놓은 일감들을 살필 겨를도 없이 서랍에 쓸어 담았다. 미수가 버스를 타고 도시를 가로질러 오기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음에도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입춘이 지나긴 했지만 여전히 바람 끝은 매서웠다. 금방이라도 눈이 한바탕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우중충했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지선은 미수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불현듯 지선은 이제야 처음으로 오롯이 미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몇 달 만에 나타난 미수의 얼굴은 부스스했다. 살이 찐 것일까. 얼굴의 윤곽선이 무디어져 많이 낯설었다.
“뭘?”
“나 없는 동안 우리 애들 걱정 많이 해줘서.”
지선은 푸, 소리를 내며 웃었다. 미수도 따라 웃었다.
“남편이 그러더라. 애들한테 맛있는 거 사주라며 네가 돈을 보냈다고.”
“내 마음 편하자고 한 일이니 고마워할 것 없어.”
사실이다. 지선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마음 앞지를 능력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마음이 내주는 길을 따라가는 일이다.
“나 살쪘지? 일 없이 밥 먹고 약 먹고 잠만 잤으니까.”
미수가 웃는 모습을 보니 여유가 생긴 것일까. 전화 속의 날선 목소리는 사라지고, 예전의 지선으로 돌아가 미수를 바라볼 여유.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니 쉬라고 너를 데려갔나 보다.”
*
병원에 들어가서는 한동안 내내 잠만 잤대. 먹은 것 없이 잠도 못 자고 걷기만 하느라 완전히 흥분한 상태였다니까. 신발을 벗겨보니 발톱도 몇 개 빠져 있었고.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까. 처음으로 정원 산책을 하게 되었는데, 맑은 하늘 아래 서서 온몸에 햇볕을 받으니 눈물이 나는 거야. 몰라. 왜 그랬는지. 햇볕, 그냥 햇볕이 고마웠어…….
너무나 내 안에 들어앉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은 그동안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거든. 지나치게 내 생각에 몰두해 있다 보니 누가 뭘 물어도 이게 무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다음 말이 또 이어지고. 앞말을 놓쳐버리니 무슨 말인지 더더욱 모르겠고…….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인들 할 수 있었겠어?
예전에는 보름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약을 타왔는데, 그때는 내가 약에 의존해야 한다는 게 끔찍이도 싫었어. 의사와 상담할 때는 그저 예, 아니요만 했지. 내 모든 상황이 싫었거든. 나중에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데도 정작 의사가 바빠서 들어줄 시간이 없는 거야. 내 안에 든 말을 쏟아내면 다 나을 것 같은데, 할 말을 다 못하니 점점 몸이 무거워져. 꿈 때문에 불안하다고 말하면 의사는 꿈에 연연하지 말라는 식이고. 급기야 산 사람, 죽은 사람의 목소리까지 내 안에 가득 차 버리더라구. 이것저것 다 품고 있으니 무엇이 내 것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려.
말이 안으로 쌓이면 병이 되는 걸까? 내 안의 축축한 말을 퍼내고 싶은데, 돌아보면 아무도 없어. 나 홀로 천둥벌거숭이처럼 서 있는 느낌이야. 남편이 받아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저도 힘들었겠지.
병원에서 돌아온 뒤 꿈을 꾸었어. 여전히 내가 죽는 꿈이야. 예전에 이런 꿈을 꾸면 무척 두려웠어. 내가 죽으면 외계인이 되어 악마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나 지금은 두렵지 않아……. 과거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거라고 믿고 싶으니까…….
……아이고, 벌써 지치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어디? 그래…… 맞아! 새로운 나로 태어난다는 이야기.
그래서 말이야……. 내가 왜 이렇게 됐나 처음부터 정리해보고 싶었어……. 엉킨 실타래를 풀 듯 찬찬히 되짚어보면서 말이야. 그런데 무서웠어……. 다시 내 안으로 파고 들어가게 될까봐……. 그렇지만 내 안의 모든 이야기를 떠나보내지 않으면 새로 시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닌가……? 맞지? 응, 그래. 그런데 사실은 지금도 좀 무서워……. 이 두렵고 떨리는 이야기들을 정말 떠나보낼 수 있는 건가 싶어서……. 아니, 하나도 안 무서워……. 이 순간 네가 함께해주고 있잖아? 그래 지선아! 나는 네가 있으니 정말 든든하단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구. 햇볕에 감사했던 마음, 그 마음을 잊지 않으면서…… 그렇게 살면 되는 거지? 지선아, 나는 말이야. 나는 정말로 내가…… 잘해낼 수 있다고 믿어. 너도 믿지? 그럴 거야. 넌 내 친구니까……. 이제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야…….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 있다구! 그렇지? 지선아, 난 조금도 두렵지 않아……. 잘해낼 수 있어! 그러니 너도 믿어. 아니, 믿어야 해. 꼭! 알았지?
*
이야기를 계속해갈수록 미수의 얼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열기로 차올랐다. 마음이 서늘해진 지선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챙겨들었다.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만 가자!”
미수는 먼저 일어서는 지선을 올려다보며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희끗희끗 흩날리고 있던 눈발이 이내 씨알 굵은 함박눈이 되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지선아, 봐봐. 눈이 오고 있어. 예쁜 꽃송이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있어. 하얀 모시나비들이 훨훨 날아오르는 것 같지 않니?”
한 옥타브 높게 솟구쳐 오르는 미수의 목소리가 공허했다. 지선은 불안해진 마음을 다잡듯 미수를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버스는 유리창에 얼굴을 붙인 채 눈발을 올려다보던 미수를 싣고 곧 출발했다.
돌아서는 지선의 몸과 마음이 잔뜩 두들겨 맞은 듯 피로했다. 무언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현듯 지선은 자신이 미수로부터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미수를 향한 몇 번의 도움마저 부채의식이란 미명으로 만든 자신의 적금통장에 불과했다는 씁쓸함으로 이어졌다.
지선은 검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눈을 맞으며 어두운 도시의 거리를 비척이며 걸어갔다. ★
약력: 1995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당선. 2004년 <문학과 경계> 신인상 수상. 소설집 『홈, 스위트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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