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에세이 제17회

예쁜이 이야기

박 래 녀(소설가)

꽃샘 추위가 심술을 부린다. 산골은 노오란 산수유 꽃으로 봄을 여는 데 때 늦
은 함박눈이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애써 피어올랐던 꽃들이 기를
못 펴고 움추릴 즈음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예쁜이의 안부를 챙
긴다.
“너 우유 잘 먹었어? 또 오줌 싸고 돌아다녔지?”하면서 예쁜이를 서로 안으
려고 야단이다.
우리집 귀염둥이 예쁜이는 아기 염소다.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녀석이다.
며칠 전이었다. 읍내 오일장을 보려 갔다가 시댁에 들려 집에 온 저녁 무렵 염
소막에 올라갔다. 며칠전부터 분만기가 있었던 암염소가 분만을 하는 중이었
다. 유심히 살피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난산 같았다. 겨울이 깊도록
산을 탄 염소들이기 때문에 분만을 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줄 알았던 것이 잘
못이었다. 어미 염소가 분만을 하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한다. 몸에 묻은 끈
적끈적한 막을 제거시켜 주기도 하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기도 한
다. 날이 추울 때는 드라이기로 털을 말려주어야 하고, 젖꼭지를 찾아 물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초유를 먹여야 병치레 없이 잘 자라는 것은 사람이나 가축이
나 마찬가지다.
아니나 다를까. 암염소는 갖 태어나 비실거리는 어린것 옆에서 두번 째 아기
염소를 낳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지만 어쩐지 기운이 딸려 보였다. 걱정이
되어 지켜보고 선 내 입술도 바작바작 탔다. 유도분만을 시도해 보았지만 나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그 날따라 멀리 간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설마가 자리잡고 있었다. 건강한 첫 배를 잘 낳았
는 데 별일 있을라구. 한참을 기다렸더니 암염소의 산도에서 발가락이 보였다.
이젠 됐구나. 나는 안심하고 염소들의 저녁거리를 챙겨주고 내려와 학교를 마
친 아이들을 데리려 다녀오고, 저녁 준비 하느라 염소의 일을 깜빡 잊고 있었
다.
남편이 왔다. 그제사 지나가는 말로
“여보, 염소막에 한 번 올라가 보고 오셔요. 몇 마리나 낳았는지.”
남편은 선뜻 염소막으로 올라가는 눈치였다. 조금 있으려니 고함 소리가 들렸
다.
“수건하고, 후레쉬 챙겨 빨리 올라온나.”
하던 일을 팽개치고, 후레쉬를 챙겨 염소막으로 달려가니 뭐하고 있었어? 여태
껏. 하면서 남편이 역정을 버럭 냈다. 어미 염소는 이미 기진하여 일어나지도
못했고, 남편은 산도에 반쯤 걸린 어린 것을 빼 내느라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진작에 손을 썼어야지. 염소 하루 이틀 키웠냐? 무슨 여자가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열 받치는 소리를 질러댔지만 나는 죄인이 되어 입도 뻥긋 할 수 없었다. 내
잘못인걸 싶어 내깐엔 남편을 돕고 싶었지만 걸린다고 내치니 겨우 한다는 짓
이 다 죽어가는 어미 염소 옆에서 목이 쉬게 울고 있는어린 것을 안고 다독거
리는 수밖에.
“이젠 틀렸어.”
화가 꼭지까지 오른 남편이 수건과 장갑을 팽개치고 염소막을 나가버리자 머쓱
해진 나는 어린 것을 안아다 어미염소의 젖꼭지를 물렸다. 어미염소는 기진해
누웠다가도 제 아기의 털을 쓰다듬고, 다리를 벌려 젖을 주었지만 아기는 젖꼭
지 몇 번 빨다가 빼고 악을 쓰며 울었다. 젖을 짜 보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아
무래도 조산이었나 보다. 나 혼자 어떻게 해 보려고 바둥거렸지만 어미 염소는
제 어린것 보호하느라 발길질에 뿔질을 해대며 사납게 굴지. 아기 염소는 제
어미 손이 아닌 것을 알고 잡기만 하면 비명을 지르지. 혼자 실랭이를 치다가
나도 두 손 들고 말았다.
저녁 상 앞에 앉았지만 밥 맛이 싹 가셔버렸다. 귀에는 계속 어미 염소의 앓는
소리와 어린 것의 우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오는 것 같아서 귀를 막았지만 견
디기 힘들었다.
그 날 따라 밤 날씨는 왜 그리 추운지. 밤마다 골짜기를 들썩거리던 개구리도
입을 봉하고, 산골 외딴집엔 바람소리만 유별났다. 저 어린 것을 어떡허지. 어
미야 어쩔수 없이 도태 시킨다 쳐도 갓 태어난 어린 생명을 그냥 방치하자니
내 속이 편할 리 없었다.
결국 염소막에 올라가 어린 것을 안고 내려왔다. 불이 활활 타는 거실의 옹기
난로 옆에 빈 단감박스를 가져다 놓고 바닥에 신문과 수건을 깔고 그 속에 아
기 염소를 넣었다. 젖먹이 우유가 있을 리 없으니 죽든살든 하는 데까지 해 보
자는 심사로 생우유 사다 둔 것을 데워 숫가락으로 떠 먹였다. 먹을 리 없었
다. 도래질 치며 우는 아기염소를 보며 아이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우리 엄마는 못 말려. 또 땡순이처럼 키울 거예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우유를 먹지 않으니 어쩌지?”
“땡순이 먹이던 우유병 없어요?”
아기 염소의 입에 내 손가락을 물렸더니 쪽쪽 빨았다. 갓 태어난 생명에겐 젖
빠는 본능만이 있었다. 혹시나 싶어 찬장 구석구석을 뒤지며 우유병을 찾았다.
있다. 아이들과 나는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탄성을 질렀다.
“오늘 밤 잠은 다 잤군.”
남편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방안으로 들어가고 나와 아이들은 우유병 소독하랴,
우유를 따뜻하게 데우랴. 법석을 떨었다.
아기염소에게 우유병을 물렸다. 처음엔 밀어 내기도 하고, 도래질을 치더니 아
기염소의 입에 우유를 한 방울 짜 넣어주었더니 당장 허겁지겁 빨기 시작했다.
됐다. 우유 한 통을 다 빨아먹고도 더 달라고 보채는 아기염소를 다독거려 박
스 안에 넣으며 나는 행복했다. 생명 하나 건질 수 있다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세상에 그리 흔한가.
“엄마, 이 녀석도 땡순이처럼 잘 크겠지요?
몇 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땡순이는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 것이 아니
라 일주일 쯤 지나서 이맘 때였을 것이다. 연두빛 새순이 앙징맞게 솟아오르는
숲을 뛰어다니며 놀던 녀석이 하룻밤 새에 고아가 되었다. 독초를 먹었는지.
독사에게 물렸는지 모르지만 어미염소가 갑자기 죽어서 우유병을 물려 키웠다.
그 땡순이는 길 잘든 개처럼 나와 아이들을 따랐다. 땡순아 부르면 멀리 숲속
에 있다가도 음매애 함면서 달려와 손바닥을 핥으며 반겨주어 키운 보람을 느
끼게 해 주던 염소였다.
그 날 밤잠을 설치게 울 줄 알았던 아기염소는 참 얌전하게 자 주었고, 다음날
부터 우리집 애완용 염소가 되었다. 이름을 뭘로 지을까 두 아이가 싸우기도
했다. 딸래미는 예쁜이, 아들래미는 아무데나 쉬를 한다고 오줌싸개라 짓자고
한다. 결국 예쁜이란 이름으로 결정되었다. 아기염소를 보며 나는 마음을 다해
속삭인다.
“예쁜아, 건강하게 자라주렴. 네가 우유맛에 길들고, 내가 어민줄 알고 따를
때 쯤이면 풀도 먹겠지. 그땐 네 친구들과 숲을 뛰어다니게 해 줄깨. 이젠 온
세상이 푸른 풀밭이 될테니까.”
2001.3.

(민족문학작가회의 경남지회 홈페이지에서)

처음 올린 날: 2002년 3월 2일(토)

박래녀(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경남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