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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제15회
보길도에서 취하다
유 경 숙(소설가)
그곳에 가 보고 싶었다. 그가 살던 섬에, 세상사 접어 두고 그만의 작은 천국
세연정(洗然亭)에 홀로 앉아 시(詩) 한 수 읊고 나서 탁주 한 잔 들이키며 무
희들의 춤사위에 흠뻑 취해 살았다던 그곳에. 고산(孤山) 윤선도를 만나러 가
보고 싶었다.
보길도. 남도 끝자락 보길도는 그의 섬으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국문학사에
빛나는 오우가(五友歌)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노래했던 그곳에, 조선시
대 단가문학의 대가인 고산의 처절한 고독이 숨어 있으리라. 쉴틈없이 뛰어온
도시생활에서 느닷없이 찾아온 실직의 황당함을 그를 만나 치유할 수 있을까?
도회지에서 유배된 듯한 느낌이 도회지 나그네를 남녘 하늘, 보길도로 향하게
했다.
땅끝마을(土末) 갈두항에서 배를 탔다. 쪽빛바다는 싱싱한 풋내음으로 살아 움
직였다. 다도해상공원의 작은 섬들은 각양의 모습으로 '내 왕국으로 오시오'
하고 마중하듯 다가왔다. 난생 처음으로 보는 바다 한가운데로 빠지는 일몰의
장관은 바로 여기가 천국인 듯 분간키 어려웠다. 하늘 속인듯, 바다 속인듯 모
르는 곳으로 붉은 해가 빠지고 있었다. 서둘렀다. 날이 저물기 전에세연정에
도착하고 싶었다. 해질녘, 그곳에서 그 노래를 불러 보고 싶었다.
어와 날 저물어 간다.
쉬는 것이 마땅토다.
배 붙여라, 배 붙여라.
가는 눈 뿌린 길에 붉은 꽃 흩어지는데
흥(興) 치며 걸어가서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설월(雪月)이서산에 넘도록 송창(松窓)에 기대어 있자.
어부사시사의 한 대목이다. 남도의 어부는 겨울에도 쉬지 않고 바다에 나갔나
보다. 날이 저물었으니 뭍에 오르는데 거기 내린 눈길에 석양이 비쳐 꽃인 듯
보였을까. 돌아가서 송창에 기대어 달빛과 더불어 밤을 보내는 어부의 풍류가
나를 남도로 오게끔 유혹한 것인가?
부용동 초입에 세연정이 있었다. 하얀 때죽꽃이 물위에 동동 떠 있는 세연지
(洗然池)는 작은 천국 그대로였다. 흐르는 계곡물을 막아서 세연지가 되었고
그 물을 끌어들여 인공연못인 회수당(回水堂)을 만들었다. 그곳에 정자를 세운
것이 세연정이다.
세연정은 여인의 마음같다. 자신의 모습을 한눈에 드러내지 않는다. 정원 전체
를 한눈에 굽어보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바위로 막아서는가 하
면 또 비밀통로처럼 이어져 곳곳에 새로운 풍광을 감추고 있다. 바로 여인의
마음처럼 은밀한 비밀이 숨어있는 듯한 정원이다.
세연정 앞에서 현지인을 만났다. 얼큰하게 취한듯한 그는 걸쭉한 남도의 사투
리로 육지손님인 듯한 일행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세연정에는 무도암과
유도암이 있다. 그는 유도암 앞에 서서 침이 튀는 것도 잊은 채 과장된 몸짓을
하면서 신명나게 설명했다.
고산이 여인을 즐겼다는 설화는 들었지만, 이곳에서도 그 사실은 여지없이 드
러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무희들을 무도암에서 춤추게 하고, 고산은
한 발짝 건너 유도암 수면 속에 비치는 춤사위를 즐겼다고 한다. 그 장면이 가
히 상상만으로도 짐작이 갔다.
외롭게 떠있는 섬 회수당에는 자태 고운 노송이 한 그루 서있다. 수면에 드리
워진 노송 그림자를 배경으로 무도암의 춤사위는 인어인 듯, 선녀인 듯 하늘하
늘 물 속에서 나부꼈을 것이다. 조선시대 여인들의 전라(全裸)의 모습이 오늘
도 물 속에 잠겨 하늘거리는 듯하여 잠시 어지러웠다.
독한 사람에게서 예술이 나온다더니 고산은 지독하게 독한 사람이었나보다. 그
늙은 나이에 그것도 혼자서 춤사위를 즐기기 위해 젊은 여인들의 옷을 벗겼을
것을 생각하니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전위예술의 장르가 조선시대에도 있었
던가? 슬픈 몸짓에 여인들의 물그림자가 침묵 속에 잠긴 듯 회수당 물빛은 고
요하기만 했다. 고산의 고절함이 좋아서 찾아왔건만 부아가 치밀어오르는 것은
또 어인 일일까?
오늘밤은 부용동에서 고산과 자야겠다. 남도의 건강한 구릿빛인지, 술취한 홍
조 탓인지 얼굴이 붉은 그 가이드아저씨는 자기가 그곳 초등학교 교사라고 소
개하고는 부탁도 안했는데 민박을 알선해 주었다. 자기네 학교 육성회장집으로
……. 대대로 고기를 잡고 살아온 어부네란다. 오늘밤은 꽃새우탕으로 저녁을
먹고 어부와 함께 그 노래를 불러봐야겠다. 달빛 가득한 송창에 기대어서…….
아침에 눈을 뜨니 민박집 부부는 벌써 바다에 나가고 없다. 어젯밤은 고산보다
내가 더 취했었나?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나그네에게 부지런한 어부의 아내는 아
침밥상에 돔매운탕을 끓여 얌전하게 덮어 놓고 나갔다. 해가 뜨기도 전에 아이
들만 남기고 부부 어부는 그들의 생활현장인 바다로 갔다.
둘쨋날은 고산이 다도(茶道)를 즐겼다던 동천석실을 가보기로 했지만 아쉽게도
갈 수 없었다. 가파른 산중턱이었고 복원이 안 되어서 산길이 험악했다. 가이
드아저씨의 구전(口傳)으로 대신 듣기로 했다.
동천석실에서 차를 끓이기 위해 저녁에 피어올리는 연기는 부용동 8경 가운데
으뜸이라고 했다. 산밑마을에서 동천석실 간에는 줄을 이용한 도르레 장치가
있었다고 한다. 끼니 때마다 식사를 도시락으로 만들어서 공수했고 글쓰기에
필요한 종이, 먹, 붓도 이 기구를 이용해서 운반했다고 한다. 때로 철저한 고
독을 즐겼을 한 문학가의 고절한 사상을 가파른 암벽 위에선 동천석실이 그대
로 전해주는 것만 같다.
윤선도는 풍랑 때문에 보길도와 인연을 맺게 됐다. 병자호란 당시 당쟁으로 서
로 이념싸움이 한창일 때 윤선도는 반대파의 모함으로 제주로 유배길에 나섰다
가 풍랑을 만나 잠시 보길도로 피신했던 적이 있었다. 오랜 유배생활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지친 노년의 정치가는 세상사를 접어두고 다시 보길도로 돌아와
산수 좋은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했던 것이다. 이곳 풍광을 벗삼아 노년생활을
편히 보내며 그 용솟음치는 문학의 꽃을 찬란히 피웠던 것이다.
고산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먹고살았다. 그 시절에 여든다섯까지 장수를 누린
비결은 보길도에 오면 그 비밀이 풀린다. 높은 산, 깊은 계곡, 상록수림으로
둘러싸인 해변, 어느 한 구석이 비경 아닌 곳이 없다. 아름다운 섬 보길도는
윤선도의 혼(魂)이 숨쉬고 있다.
나는 이제 육지로 가는 완도행 카페리호를 탔다. 작은 섬 보길도가 점점이 멀
어져 바다에 한 점으로 떠있다. 갑자기 등줄기에 식은 땀이 밴다. 이번 여행이
도회지에서 열심히 일한 후에 찾아오는 휴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그 고절한 고산의 체취가 더욱더 선명하게 내 가슴 속에 고스란히 아로새겨지
지 않았을까? 일자리 없는 서울로돌아갈 현실이 아찔하기만 하다.
남녘의 봄은 나그네의 마음도 모른 채, 누렇게 보리물결로 익어 가고 있었다.
(1998년 [창작수필] 가을호에 발표)
처음 올린 날: 2002년 2월 1일(금)
유경숙(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1978년 창작수필 신인상 [기우도(騎牛圖)] 당선
2001년 농민신문사 신춘문예 단편소설 [적화(摘花)]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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