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에세이 제10회

여전사와 DIVA

박수영(소설가)

얼마 전에 연예인 소식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디바(DIVA)인가 하는
여성 3인조 그룹이 나와서, 자신들이 <여전사>라는 별칭이 붙는 것에 대해 인터
뷰를 하는 장면이었다. 그녀들이 말하기를,

"왜 우리는 <여전사> 이어야 하나요? <요정>은 안되는 건가요. 우리도 귀엽고
예쁘게 차려입으면 요정이 된다구요. 여전사는 무슨 여전사에요. 싫어요!"

이런 내용이었다.

순간 나는 상당히 놀랍기도 하고, 저 여성 3인조 아가씨들은 <여전사>를 <여깡
패> 정도로 알고 있군. 하고 생각 했다.

한국 영화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여성 캐릭터, 여전사. 그 캐릭터는 불과 1
년 전만 해도 TV나 영화에서 감히 부각시키려고 생각하지 못했던 한국 여성으로
서의 새로운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왜 디바 아가씨들은 여전사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을까.(나는 지금 요정과 여전
사 중에 여전사가 더 낫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기사, 여전사를
부각시키는 한국 매스컴 주체측(?)이 여전사를 그저 늘씬한 여자가 남자들에게
이유없이 콧대를 세우거나, 대책없이 터프하게 굴거나, 아니면 그저 총이나 칼
을 들고 싸움을 하거나, 하는 이미지로 밖에는 표출해 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듯도 하다.

외국 영화에서는 남성들 못지 않게 용맹스럽고 정의감에 불타는 여전사의 캐릭
터를 간간이 본다. 시고니 위버(에어리언)나 조디포스터(양들의 침묵) 재시카랭
(뮤직박스)등이 그 대표적인 배우들인데, 그 여배우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남성
들을 압도하는 공정함과 지적인 깊이를 갖고 있다라는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러한 여전사의 이미지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었다. 그 이유
는 명확하다. 여성들이 바로 남성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강인함과 정
의, 공정함을 표현해 내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20대 초반의 한국 여성 군인들의 훈련과정을 다룬 프로그램을 시
청한 적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 자신 예기치 않은 감정을 느낀 적
이 있었는데, 그 감정은 일종의 놀람이기도 하고, 고양이기도 하고, 약간의 눈
시울을 동반한 감동이기도 하였다.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여성이, 그것도 20대
초반의 어린 여성들이 그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고, 식구들 앞에 다가와 늠름하
게 경례를 붙이는 모습. 강인한 표정 속에는 분명 그동안 훈련의 고통에서 온
울먹임이 엿보였지만, 그녀들은 참을 수 있을 만큼 자신의 나약함을 참고 있었
다.

그 장면은 나에게 지금까지 어떠한 여성이 보여준 감동의 드라마보다도 더 강
렬하고 진한 것이었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시울을 참았는데, 이것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청승
(?)이고 감동일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성은 남성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
한다. 대학시절 나는 성급한 패미니스트들과 친분을 맺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인한데, 자라나면서 연약하게 길러지기
때문이라는 억측 논리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이 나약하게 길러진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여성이 남
성보다 강인한 존재다, 라는 말은 틀렸다.

여성이 남성보다 약자라고 치자.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조건 때문에 오히려 여
성이 남성보다 강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약자가 자신의 약점을 넘어서서 강자의 여유와 철학을 보일 때, 그 약자는 진
정으로 주인이 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성공한 약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감동한다.

80년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숭고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억
눌리고 가난하게 살았던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의식을 갖고 헤게모니를 쟁취할
때, 그 피압박 계급에게는 브루조아지보다 훨씬 건강하고 숭고한 무언가가 있다
고 생각했었다.(물론 그 새로운 헤게모니는 계급적인 복수심이나, 울분 같은 것
이 전제되어서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여성이 남성보다 약자임을 인정하는 어떤 얌체같은 패미니스트들은, 자신들은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고 그저 방안에 앉아서 권리를 달라고만 외치고 있다. 남
자들의 특혜를 아니꼬와 하고, 따뜻한 방안에 앉아 이거 줘, 저거줘, 하고만 있
다.

한때 나는 여성들은 왜 자발적으로 군대를 보내 달라고 외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다. 남성들과 똑같은 특혜를 받고 싶으면 그 만큼 희생을
해야 하며, 그 희생의 형식이 군대건, 공익근무요원이건, 사회에 일정 정도를
봉사하고 나서야 권리를 달라고 외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우리 여성들
은 지하철 역에서 시민들의 질서를 감시할 수 있고, 도로변에서 차선을 위반하
는 차량들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용맹함(^^;)과 지략 정도는 갖고 있다) 혹은
군복무를 자원하는 여성에게 만큼은 남성들과 똑같은 특혜를 주시오, 라고 주장
하는 것이 더 공정한 게 아닐까.

나는 이미 늙었고(^^;) 군대를 갈 나이도 훌쩍 지나버렸지만, 지금에라도 여성
권리를 위해 여성입대가 의무화 된다면, 혹은 그에 준하는 제도를 마련한다면,
지금 새록 새록 자라나고 있는 우리 여성들의 권익을 위해서 나는 내 이 보잘
것 없는 1-2 년을 바칠 의향이 있다. 진심으로.

악의에 찬, 얌체 같은 약자는 성공하지 못한다. 오랜동안 질서정연하게 체계화
된 강자의 철학과 옹벽을 넘어설 수 없다. 디바 아가씨들이 싫어하는 <여전사>
에게는 진정한 패미니즘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패미니스트는 적진, 남성들을 향해서만 투덜대지 말고, 오히려 나약한
여성들을 진정한 <여전사>로 변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을 남성들보다
한 차원 높은 더욱 강인한 존재로 고양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가 어려운 과제라는 걸 알고 있다. 사실 나는 프롤레타리
아 혁명이 숭고했다, 혹은 숭고하다, 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
는 피억압 계급이 억압 계급보다 정신적으로 더 여유롭고, 자유로우며 건강하고
그들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지 못한 듯하다.

여성해방도 똑같은 지점에 있다.

태생적으로 나는 <갈등>이나 <투쟁>이란 어휘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지만, 아
직도 헤겔의 유물변증법을 믿고 있는 나로서는 인류역사 속에는 여전히 다양한
갈등 요인들이 존재하며, 역사는 그것들이 부단히 투쟁하며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감동을 준 학
자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을 보면, 지독한 자유민
주주의의 신봉자인 일본인 3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셜리즘
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우위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적진(?)인 소셜리즘에
대해 깊은 이해와 진지한 존중, 사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펼치는 논리를 보면, 적진에 대해 그토록 조심스럽고, 그토록 애정어리
며, 그토록 풍부할 수가 없다. 그는 적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이 자유민주주의자
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

여성들이여, 우리도 이제 여전사로 불리는 것에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도 남성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을 뛰어 넘어야 하지 않겠는가.

(2001년 1월 15일)

처음 올린 날: 2001년 10월 9일(화)

박수영(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강원도 태생.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업.1997년 [실천문학]
에 중편 [바람의 예감]을 발표하며 등단. 장편소설 [매혹](2001) 펴냄
현 직장. 하우아트 갤러리(www.howart.com)
홈페이지: http://user.chollian.net/~july123/hom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