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불우하고 불행하도다!
내게는 이 짧은 산문 하나가 쥐어짜도 즙액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삭
정이에 움을 틔워내라는 듯한 난제(難題)이자, 부박(浮薄)한 세대에 몸 한
자리 얹은 처지를 스스로 인정하고야 마는 부끄러운 기록이다.

공연히 어렵고 거창하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나는 <줄탁의 인연>이라는 특
집란에 이름을 걸고 글을 쓸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얼떨결에 청탁서를
받아들고 오긴 했으나 그 내용을 알고 나니 글을 쓸 작심이 뜨거운 훈김 쐰
털실 풀리듯 스르르 늘어져버렸고, 지난호에 개재된 최성각님과 최명길님의
미문(美文)까지 읽고 나니 겁까지 덜컥 나는 것이었다.
끝내 이 부끄러운 고백을 하고야 말아야 하는 것인가?

"난......존경하는 스승이 없는데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스승이 없다니?"

"말 그대로예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겐 그런 인연이 없는 것 같아요. 악
연에 대해 쓰라면 책 한 권은 족히 쓰겠는데, 제가 그림자라도 되어 좇고
싶을 정도로 존경했던 스승은 없는걸요......아무래도 못 쓰겠어요."

"그럼 문학적인 스승이라도 있을 것 아니에요?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
더라도 성장에 영향을 끼쳤던 책 속의 스승이라던가 따라 배우고 싶은 선배
작가라던가, 아무튼 써보도록 해봐요."

사람 좋은 주간께 이런 말까지 들어가면서도 못 쓰겠다고 우기면 무지무식
불한당 노릇밖에 되지 않아 울며 겨자먹기로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삐약삐약 껍질 바깥의 세상을 향해 생명의 나래짓을 하는 병아리
가 아니라 인간들의 단백질 보충원으로 쓰이기에 족한 무정란밖에 되지 않
나 보다, 생각하니 우울하고 서글픈 생각까지 다 들었다.

사람으로 태어난 세상에서 내게 형제의 연으로 맺어진 이는 단 하나 뿐이
다. 나와 세 살 터울인 남동생이 바로 그인데, 녀석은 지금도 불후의 명작
시나리오를 쓰겠노라고 온갖 야무진 공상을 다 펼쳐들고 있다. 천지간에 단
둘 뿐인 남매가 나는 예술가고 너는 딴따랍네 하면서 아무도 가르쳐준 일없
는 길을 걷고 있는 연유인즉, 동생의 해석에 따르자면 우리가 '권위'에 길
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사실 보통의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공식적인 권위란 바로
학교 사회를 통해 만나는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것이다. 부모들은 때로
말 안 듣고 떼질 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선생님한테 이른다!" "너 그러면
선생님이 혼내 주실 꺼다!"는 으름장을 놓곤 한다. 아이들은 부지불식간에
'선생님'을 무섭고도 지엄한 존재로 인식하면서 학교라는 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와 동생의 첫 번째
선생님은 바로 엄마였다. 존경하는 스승을 갖지 못했다고 꺼내놓은 말머리
가 더욱 민망하게스리, 나의 부모님은 초등학교 교사이다. 유년의 기억이
생겨 자라날 무렵 우리는 부모님을 따라 지금은 관광명소로 유명해진 정동
진에서도 십리를 걸어 들어간 오지 심곡 마을에서 살게 되었다. 전교생 육
십 삼 명의 심곡 분교에 두 분이 부부 교사로 부임한 것인데, 교사가 두 명
뿐이었으니 당연히 우리의 선생님은 엄마와 아빠였다. 사실이 이러하건대
우리에게 선생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어려운 마음이 생겨날리 만무했다.

그래도 엄마 선생님은 꽤 공평무사한 태도를 지키려고 애쓰신 듯 한데, 언
젠가 어린 마음에 용렬하게도 다른 아이들을 규합해 나와 공부에서 경쟁상
대였던 어떤 아이를 요즘 말로 이지매 비슷하게 따돌린 일이 있었다. 그 일
을 알게 된 엄마 선생님이 얼마나 호되게 나를 야단쳤던지, 학교에서 눈물
을 빼고 반성문까지 쓰고 나와 측백나무 울타리 옆에 있던 관사에 도착하자
마자 엄마에게 갖은 신경질을 다 부렸던 기억도 있다. 학교에서는 깍듯이
'선생님'으로, 학교에서 백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집에서는 '엄마'로 부
르고 대우하며 나름대로 아슬아슬한 혼돈의 줄타기를 해내기에 안간힘을 썼
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부터 지금껏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고 배움을 얻었지만 애초
에 상실해버린 '권위'에 대한 존경과 숭상이 불현듯 솟구쳐줄 리 없었다.
나는 비교적 사랑과 관심을 받을만한 객관적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삐딱하고 건방진 학생이었고, 선생님들도 사람인 이상 이런 학생에
게 무한정 무조건의 애정을 쏟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불행
하게도 기억 갈피갈피에 여태껏 남아있는 선생님들은 거의가 예민한 성장기
에 쓰린 상처를 주었던 분들뿐이니, 내 방자하고 못난 기억력을 탓해야 할
것인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유로 따귀를 얻어맞고 분을 못 참아 가
방을 싸들고 나와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겠노라 선언한 적도 있었고, 편
견과 편애로 아이들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들게 했던 담임과 마주하는 성적
상담이 싫어 복수하는 심정으로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선
생님들은 종종 "기집애들은 소용없어. 가르쳐봤자 고맙다고 찾아오는 일 하
나 없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고, 대학 시절의 어떤 은사는 정색으로 '여
성 교육 무용론'을 말하며 학점을 깎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한 때
이성(異性)의 테우리를 벗어난 혈친적인 애정과 친화력을 진정으로 받은 일
이 있었나 생각하면 나의 복없음을 개인적인 불행으로만 치부하기엔 좀 억
울하기도 하다.

물론, -나는 이런 식의 논조 펼치기를 썩 좋아하지 않지만- 좋은 선생님들
도 계셨다. 사실 미숙한 내가 채 느끼지 못한 보이지 않는 그분들의 사랑과
배려와 관심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외롭고 고된
글쟁이의 길에 몸을 싣기까지 숱한 책 속의 스승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
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로부터 채만식, 강경애, 이기영, 염상섭......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꼽으라면 손가락이 다 모자란다. 내가 하는 말이
온전히 내 말이 아님, 내가 쓰는 글이 온전히 내 글이 아님은 나의 좁은 뇌
엽을 스쳐간 무수한 역사의 흔적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역사란 단순한 연대기의 기록이 아니다. 비록 내가 미
숙한 자의식으로 말미암아 오만과 독선으로 권위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기에
급급했을지도 모르지만, 문학 앞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겸손하고 겸허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창이 흐르는 세상의 길에 바싹 배를 붙이고 낮은
포복을 하면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를 염원한다. 나는 문학
을 통해 삶을 배웠고, 또한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하기에 일상 속에서 부
딪히는 타인들의 삶, 그 살아있는 역사를 무구한 배움의 눈으로 바라보려
애쓴다. 상처입고, 부대끼고, 때로는 짓밟혀 만신창이가 된, 그리하여 통속
의 시각으로는 별다른 존경이나 공대를 받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하지만 부끄럼 없이 담담한 패배를 나의 스승으로 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스승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인 모양이다. 나는 언제나 내 껍질
바깥 세계에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므로 앞으
로 수많은 줄탁의 인연에 대한 기다림과 그리움이 나를 설레이게 한다면,
너무 심한 비약에 자기합리화일까.

처음 올린 날: 2001년 6월 1일
(금)
김별아(소설가) --------------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