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우는 꼬리가 자랑이다 外 1편/ 나정욱:시인뉴스 포엠 (poetnews.kr)]
여우는 꼬리가 자랑이다
꼬리는 사라졌어도 꼬리뼈는 남아있다
사라진 꼬리에 대한 그리움인지 꼬리뼈가 시큰대더니
비가 오려고 날이 꾸무룩하면 여우가 길게 우는 것처럼
꼬리뼈가 길게 아프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여우나 늑대의 꼬리처럼
꼬리를 달고 다닌다
일종의 꼬리표인데 지나온 세월을 기록한 긴 이력서이다
꼬리는 사라졌어도 꼬리뼈는 남아있으니
꼬리가 있었다는 흔적처럼 지나온 세월의 뼈를 기록해 보라는 것이다
이력서에 기록된 앙상한 뼈다귀
꼬리와 함께 사라진 아름다운 꽃 같은 추억은 바람에 분분 사라지고
뼈 구멍을 통해 누군가 피리를 분다
꼬리표처럼 남은 사람들의 지난 이력이 계명으로 적혀있다
도 레 미 파 솔 라, 시
시에서 한 음만 더 올리면 굵은 눈물처럼
도 음이 떨어질 것 같아 계속 시 음만 절규하듯 내뱉는 사람들
여우의 자랑은 화려한 꼬리에 있다
늙은 여우들의 울음이 여우 꼬리처럼 흔들렸다
얼룩진 유전자
아름답고 깨끗했던 나의 유전자가 지금은 얼룩진 유전자가 되었네
어떻게 아름다운 꽃이라 부를 수 있으랴
지독하고 지독한 것만이 살아남은 이 지구의 생명체들
원래 생명의 본질이 그런 거라고
원래 자연의 법칙이 그런 거라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거라고
신이 있다면 이런 상황을 신이 모를 리가 없다고
그러니 그런 줄 알고 삶을 긍정하라고
그러나 얼룩지고 얼룩진 나의 유전자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얼룩지고 오염된 모습
이걸 하나로 함축하고 피어 있는 한 송이 꽃
꽃 같은 너
너를 어떻게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랴
봄이 되면 여기저기 종기처럼 피어나는 꽃들
전쟁터에 터지는 포탄의 파편처럼 날리는 얼룩진 꽃잎들
포화 속에 스러지는 무수한 어린애들을 보면서 어떻게 꽃들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랴
무수한 주사약과 경구약으로 얼룩진 몸처럼
전쟁으로 신음하는 지구와
거기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내 몸은 어쩌면 이렇게 닮은 것이냐
내 몸의 유전자처럼 얼룩져 피어나는 봄,
꽃을 보고 나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얼룩지고
얼룩진 내 얼굴 같은 언어의 파편으로 기워진 나의
시편들!
※ 나정욱 시인
『한민족문학』(1990년)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며칠 전에 써 두었던 내 문장에서 힘을 얻는다』(2019년),
『눈물 너머에 시(詩)의 바다가 있다』(2019년),
『라푼젤 젤리점에서의 아내와의 대화』(2021년)의 시집이 있음.
2024년 울산문화관광재단 예술창작지원 사업 선정.
한국작가회의, 울산작가회의 회원.
회원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