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17)

살인의 추억의 後記 (afterword)

1. “범인은 죽었다고 본다. 자살할 놈은 아니고 …”

하승균 전 경정은 1986년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첫 사건이 벌어졌을 때 수원경찰서 형사계장으로 재직하던 중 수사본부에 파견됐다. 이후 경기지방경찰청 강력주임, 수원남부서 형사과장 등을 거치며 이 사건을 계속 수사했다. 천신만고 끝에 잡은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증거불충분으로 내보내며 아쉬워했던 하 경정은 “경찰에서 은퇴한 지금도 여전히 그 사건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언론 매체들은 그 옛날 그를 가리켜 ‘국내 최고 강력통’이라고 불렀다. 사건 현장에서 그는 기자들에게 영락없는 ‘형님’(기자들이 형사들에게 쓰는 일반적 호칭)이었다. 아들뻘 되는 초년병 기자들도 환갑을 코앞에 둔 그를 형님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하 경정은 언젠가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은 죽었다고 본다. 자살할 놈은 아니고…… 살아 있다면 절대로 범행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범인에 대해 “살인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에서 벗어나고, 시체 앞에서 과시하려는 변태”라며 “불행한 가정에서 성장해 부모로부터 폭행당하고 친구도 없었으며, 술을 많이 마셨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 경정은 2003년 이 사건의 수사 과정을 담은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을 냈다.

그가 경찰을 퇴직할 무렵인가 경찰 후배들에게 또는 어느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말한 내용이다.

“1971년에 경찰에 들어왔으니 35년인데…… 맥아더가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했지. 내가 지금 그런 기분이 들어. 나랑 부닥친 사람들이 많았겠지. 살인사건만 292건을 수사했으니 강도·폭력은 또 얼마나 많았겠나. 아마 내 손으로 교도소에 보낸 사람만도 수천 명은 될 거야”

“용의자들은 형사 앞에 앉으면 불안해하지. 오히려 형사보다 더 고자세로 나오는 용의자도 있지만 속맘은 다 불안해해. 그런 용의자를 거칠게 다루면 안 돼. 참고 인간적으로 접근해야지. 사건마다 다들 범행동기가 있게 마련이니, 형사가 그 동기를 이해할 수 있어야 용의자가 비로소 맘을 터놔……”

“형사들은 육감으로 수사를 한다고 하는데, 육감도 과학이야. 과학은 곧 경험이거든. 적어도 검증된 경험은 과학이다. 그러니 여러분이 현장에서 겪은 성공과 실패를 자꾸 동료들에게 알려 공유할 필요가 있어. 경험을 검증해 보자는 것이지”

“그땐 범인 잡으면 재판까지 안 데리고 가려고 했어. 반항할 것 아냐. 그럼 내가 그 자리에서… 난 결국 실패한 형사야. 내가 화성사건과 관련해 자주 신문에 나니까 어떤 후배들은 날 대단하게 여기는데 그게 아냐.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내가 참 무능했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지.

화성사건에서는 마땅한 영웅이 없으니까 내가 영웅처럼 된 거야. 피해자 가족 입장에서 보면 죄인이고, 나 자신이 피해자이기도 하고 부하 직원들이 죽고 구속되고 과로로 쓰러져 지금도 불구로 있고……. 내가 부각된 것이 하나도 안 반가워. 그래서 나중엔 기자들 피하고 핸드폰 꺼 놓고 했지. 형사는 발로 뛰어서 결과로 말하는 거야. 그런데 난 화성에서 아무것도 못 보여 줬잖아?

난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누군가가 범인을 잡아낼 것이라고 믿어. 그 소식 들으면 내 삼겹살에 소주 한잔 사지. 그럼 건강들 하세”

“(화성사건) 10건의 공소시효가 끝날 때마다 언론에서 나를 찾아와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냈는데, 10차 사건이 2006년 4월이면 만료가 되니 또 그럴 것 아냐. 범인도 못 잡은 놈이 자꾸 신문에 나는 것도 망신스럽고 그때까지 월급 받고 있기도 민망해서…… 35년 경찰 잘했는데 중간에 화성에서 발목이 잡혔어. 아니 그놈한테 잡힌 거지.”

“처음 범인이 금방 잡힐 줄 알았다고. 그래서 범인 잡을 때까지 집에 안 가기로 작정하고 밤낮없이 동네를 헤매고 다녔는데 그것이 시련의 시작이었어.

수사본부에는 매일같이 용의자들이 불려 왔지. 그럴듯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고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어 동네마다 다니며 농사일도 거들고 못 마시는 술도 한 잔씩 나누며 사람들로부터 정보가 될 만한 얘기를 듣고 다녔어. 속이 타들어 가니까 그때 담배도 배웠지.”

“도무지 수사가 진척이 없었어. 일이 안 풀리려니까 1988년 초에는 부하들에게 조사를 받던 용의자가 숨졌고. 담당 형사 3명이 구속되고 나도 직위해제 됐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 그해 가을엔 가장 아끼던 부하가 뇌출혈로 쓰러져 불구가 됐어. 원인은 물론 과로였지. 나는 그 부하에게 평생 죄인이 된 셈이야.”

“범인을 잡지 못한 형사는 죄인이야. 지금도 잡고 싶고, 옷을 벗고 난 뒤에도 잡고 싶다니까. 못 잡았으면 잡아야 하는 것이 형사야. 형사는 그 이상도 이하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 잡아야지. 꼭 잡아야지.”

2.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수사 전말 -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화성군 태안읍과 정남면, 팔탄면, 동탄면 등 태안읍사무소 반경 10km 내 4개 읍면에서 13~71세 여성 10명을 상대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40여 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화성군이 인구 백만 가까이 되는 대도시가 되었고 태안읍은 병점동 태안지구가 되었으며 농촌이 아니라 아파트 밀집 지역으로 변모하였다. 태안읍사무소는 화성시 동부출장소가 되었다.)

그 당시, 살해에는 대부분 스타킹이나 양말 등 피해자의 옷가지가 이용됐다. 끈 등을 이용해 목을 졸라 살해하는 교살이 7건, 손 등 신체 부위로 목을 눌러 살해하는 액살이 2건이었다.

범인은 버스정류장에서 귀가하는 피해자 집 사이로 연결된 논밭길이나 오솔길 등에 숨어있다가 범행했는데 당시 주변이 논밭이어서 야간에 인적이 드물었던 점을 이용했다.

당시 경찰은 성폭행 피해를 가까스로 면한 여성과 용의자를 태운 버스운전사 등의 진술로 미뤄 범인에 대해 20대 중반, 키 165~170cm의 보통 체격 남성으로 특정했다. 하지만 8차 사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건의 범인은 끝내 검거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사건은 건국 이래 최대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지칭됐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급반전이 일어났다.

피해자들의 유류품에서 검출된 DNA 검사 결과 1995년 10월부터 24년째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이춘재가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재수사가 급물살을 탄 것이다. 이춘재가 자백하면서 용의자가 특정됐다. 경찰은 2019년 12월 사건 명칭을 기존 ‘화성연쇄살인 사건’에서 ‘이춘재연쇄살인 사건’으로 변경했다.

(경찰은 2019년 12월 17일,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사건 명칭을 ‘이춘재연쇄살인 사건’으로 변경한다고 밝혔다. 경찰은 ‘화성시 주민들이 사건의 명칭 변경을 요구해서 화성시 의회가 사건 명칭을 이춘재연쇄살인 사건으로 변경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경찰은 2019년 9월 19일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증거물 3건에서 검출된 DNA와 이춘재의 DNA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경찰은 앞서 7월 15일 현장 증거 일부를 국과수에 감정 의뢰했고 그 결과 현재까지 3건의 현장 증거물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는 대상자가 있다는 통보를 받고 재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3차례 사건은 5차 · 7차 · 9차 사건으로 이 중 9차 사건에서는 피해 여성의 속옷에서 용의자 이춘재의 DNA가 검출된 것으로 확인됐다.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는 1994년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인한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1995년 10월부터 24년째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그 극악무도한 사건에서 무기징역이 아니고 사형이 선고되어 집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화성 사건은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묻혀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끝내 암흑의 심연 속으로 빠져 버렸을 것이다.)

사건의 유력 용의자 이춘재는 9월 24~27일 부산교도소에서 이뤄진 4~7차 대면 조사에서 화성살인 사건 10건을 비롯해 14건의 살인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특히 범인이 이미 붙잡힌 8차 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첫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 1986년 이후 34년 만이다.

하지만 마지막 범행은 1991년으로 당시 살인사건 공소시효가 15년이어서 이미 2006년 4월 2일 공소시효는 만료된 상태였다.

(2007.12.21. 형사소송법이 개정 공표되면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는 공소시효의 기간이 25년으로 연장되었다. 다만 시행 전에 범한 죄에 대해서는 종전의 규정이 적용된다. 개정 이전에는 살인의 공소시효가 15년이었으나 2006년에 ‘대구 개구리 소년 사건’과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잔인한 살인범을 더 이상 처벌할 수 없게 되었다는 비판 여론에 따라 위와 같은 내용으로 개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 폐지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고 마침내 2015.7.24. 사람을 살해한 범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하여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규정이 국회를 통과했다.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된 것이다.)

그리고,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1996년 ‘날 보러 와요’라는 연극이 상연됐으며, 2003년에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영화가 개봉되었다.

‘살인의 추억’ 속 허수아비 의미는?

영화 ‘살인의 추억’의 모티브는 화성연쇄살인 사건이다.

그 영화 속에 나오는 허수아비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수수께끼의 허수아비는 ‘화성연쇄살인 사건’ 당시 화성군 주민들이 세운 것이 아니다. 담당 형사들이 도무지 수사가 진척되지 않자 답답한 나머지 유명한 무당을 찾아갔고 무당의 말에 귀가 솔깃해서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허수아비에 쓰여진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라는 문구가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당시 경찰은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집에는 안 가본 데가 없었다.

용의선상에 없었던 인물

경찰은 그 당시 이춘재를 조사했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그가 수사망을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과거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 관계자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을 재수사하고 있는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 수사팀은 ‘과거 수사기록에서 당시 이춘재가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내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가 무슨 사건으로 몇 번 조사를 받았고 어떤 진술을 했는지 등은 구체적으로 밝히기 곤란하다’고 했다.

이춘재는 당시 경찰에겐 중요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오래 추적한 하승균 전 경정은 ‘이춘재는 당시 용의선상에 없었던 인물’이라고 했다. 다른 경찰 관계자도 ‘이춘재가 화성에 살았다면 당연히 조사했을 텐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이춘재가 조사를 받았던 것은 당시 ‘화성군 태안읍’에 살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본적지는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 진안동)’으로 이곳에서 태어나 1993년 충북 청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화성군 태안읍, 팔탄면, 동탄면 등에서 10차례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지역에 사는 남성들은 거의 모두 경찰 수사의 표적이 됐었다. 그 당시 그 지역에 살았던 한 남성은, “당시 낯선 사람이다 싶으면 전부 경찰이었다. 동네 남자들은 물론이고 공장 다니는 사람들까지 다 경찰이랑 얘기해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이춘재는 1990년 수원지법에서 강도예비와 폭력 등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었다. 태안읍에 살고 강력범죄 전력이 있는 이춘재를 경찰이 소홀히 여기진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용의자는 B형이라고?

그런데도 그가 용의 선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던 이유는 ‘혈액형’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경찰은 4·5·9·10차 사건 범인의 정액과 혈흔·모발 등의 감정을 통해 용의자의 혈액형을 B형으로 추정했다. 당시 DNA 분석기법이 발달하지 않아 혈청학적 방법으로 감정했는데 그마저도 혈액이 아닌 모발이나 음모 등 다른 감정물들을 상대로 감정한 것이다.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다. 그가 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항소심 판결문엔 “범행 현장에서 수거된 모발 중 피고인의 혈액형과 같은 O형의 두모 2점, 음모 1점 등이 나왔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시 경찰의 의심을 샀어도 혈액형이 달라서 수사 선상에서 제외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당시 이춘재의 처제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한 형사는 “화성 경찰에서 찾은 건 혈액형 B형의 용의자였는데, 우리가 채취한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었다. 혈액형이 다르다는 이유로 화성수사본부가 청주로 내려와 공조 수사를 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이 집착했던 B형 혈액형은 잘못된 것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의 의뢰로 화성의 현장증거물을 재조사한 결과 사건 당시 물품에서 채취된 성분의 혈액형은 O형이었다. 국과수 관계자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 피해자의 감정물에서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용의자의 DNA를 분리했다. 용의자의 혈액형이 O형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당시 혈액형은 용의자를 추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당시 수사팀으로서는 국과수가 혈액형을 잘못 분석했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당시 수사본부는 화성군 태안읍 어느 동네에서 여자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하고 다닌다는 제보를 받고 A를 9차 사건 (1990년 11월15일 발생)의 범인으로 검거했다.

9차 사건은 여중생 김○○ (그 당시 14세) 양이 손과 발이 스타킹으로 묶인 채 숨진 사건으로 범인은 김 양이 숨지고 난 뒤에도 면도칼로 가슴을 난자하고 볼펜과 포크 등을 신체에 삽입했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주요 장면으로 등장했었다.

경찰은 A를 검거해 최종 자백을 받아 냈다.

그는 자신이 귀가 중인 김 양을 납치해 재갈을 물리고 옷을 벗기고 팔다리를 묶고 난행을 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A의 최종 진술에 입회했던 한 경찰 간부는 “범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했다. 면도칼을 이용한 시신 난자, 볼펜과 포크를 이용한 난행 등 그의 진술은 분명 본인이 했던 일을 아주 세세하고 또렷하게 담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 수뇌부는 ‘검거를 하고 초기에 조사를 했던 수사팀에서 가혹행위를 하며 진술을 강요했거나 미리 진술할 내용을 알려 주는 선지식을 줬을 수도 있다’며 일단 제동을 걸고 재조사 지시를 내렸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신중을 기한 것이다.

경찰은 일단 확인된 단순 성추행 사건들만을 가지고 그를 구속한 뒤 검찰의 지휘를 받아 재수사했다.

재수사 과정에서 A는 “범행 후 손에 피해자의 피가 묻어 현장에 있던 소나무 가지에 손을 문질러 피를 닦았다”고 추가적으로 진술했다. 국과수가 현장에 내려와 감식한 결과 범행 현장 주변 소나무 가지와 잎에서 실제 혈액 반응이 나왔다.

수사진도 전혀 몰랐던 사항이었다. 경찰은 이제 누구라도 A가 범인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나갔다. A는 여전히 진술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범행을 시인했고 경찰도 이제는 됐다고 확신하고 수사를 마치고 그를 검찰에 송치하려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날벼락이 떨어졌다. 국과수 감정에서 ‘정액 등 이물질 없음 판정’까지 받은 피해자 김양의 옷가지를 검찰에 증거물로 보내기 위해 경찰서 캐비닛을 열고 나서 직원 중 한 사람이 “이거 정액 아냐?”라며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다.

수사본부는 발칵 뒤집혔다. 정밀 감식결과 아무것도 없다던 옷가지에서 정액이 그것도 밤알만 한 큼직한 크기로 묻어 있었던 것이다. 재감식한 결과 정액이 맞았다. 그것도 용의자 A의 혈액형과 같은 정액. 경찰은 당시 이를 증거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치열하게 내부 논란을 벌였다.

결국 경찰은 정액을 일본으로 보내 DNA 감정을 의뢰했다. 결과는 용의자의 것과 ‘불일치’였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는 유전자 감식을 위해 샘플을 미국으로 보낸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일본에 의뢰를 했다. 왜 봉 감독은 일본을 미국으로 바꿨는가? 혹시 반일 감정 때문에 아니면 미국주의를 신봉하기 때문인가?)

하지만 우리나라 과학수사기법의 발달사는 화성연쇄살인 사건 수사와 함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의자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한 것이 비록 일본에 의뢰한 것이었지만 우리나라 범죄수사에서 유전자 감식 기법을 처음 적용한 것이었다.

A는 곧장 풀려났고, 몇 년 전 간암으로 숨졌다.

2003년 8월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인 한 사형수가 ‘내가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선언을 했다.

그가 연쇄살인 사건이 진행 중일 때 태안읍에 거주한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난리가 났었다.

당시 경기경찰청 강력계장으로 있던 하승균 경정은 곧바로 대전교도소로 내려가서 그를 만나 조사했다.

하 경정이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했다.

“아냐…… 아니라니까. 사형수니까 불안해서…… 화성사건 범인으로 지목되면 또 재판을 받아야 하고 그러면 사형집행이 늦춰지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 그 자식…… 범인이 아니라고 해도 자기가 범인이라네. 우길 걸 우겨야지.”

하 경정의 교도소 조사 뒤에 나온 유전자 감식 결과도 그는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우리나라 경찰도 1992년경부터 유전자 감식을 도입했고 2003년 그 무렵에는 거의 100%에 가까운 아주 정확한 감식이 보편화되었다.)

4차 사건 (1986년 12월14일)이 발생한 뒤 어느 심령술사가 수사본부를 찾아 왔다.

그 심령술사는 “갑자기 화성사건 범인 이름 ‘B’가 떠올라 사건 발생 동네에 가 보니 실제로 그 이름의 남자가 살고 있더라. 알아보니까 B는 피해자 이 모를 쫓아다닌 적이 있었고 사건 당일에도 그 남자를 이 모의 집 근처에서 봤다는 사람이 있다.”라며 B가 범인인 이유를 30여 개나 나열해서 경찰에 보냈다.

그럴듯했다.

하지만 역시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당시 경찰이 심령술사에게 ‘증거가 없어 안 된다’고 난색을 표하자 그는 ‘증거도 있다. 저기 야산에 가면 범인이 피해자의 손목시계와 반지를 묻어 놓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정확한 지점까지 가리켰다. 실제 피해자의 시계와 반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경찰은 심령술사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인원을 투입해 심령술사가 가리킨 지점을 파헤친 것이다.

아예 야산 하나를 모두 파헤치다시피 한 경찰은 그때서야 ‘이게 아니구나’ 생각하고 심령술사를 돌려 보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경기도가 아닌 다른 지역의 경찰서 형사들이 화성 4차 사건의 범인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범인은 다름 아닌 심령술사가 지목했던 B였다. 수사본부에서 외면을 당한 심령술사가 다른 지역 경찰에게 제보를 했고 이 경찰서 형사들이 밤에 화성으로 와서 B씨를 검거해 간 것이었다.

확인 결과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다.

4차 사건의 용의자로 떠올랐던 남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10년 전 죽었고, 7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던 남자는 목을 매 자살했다.

9차 사건의 경우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A는 몇 년 전 간암으로 죽었고, 역시 용의자로 지목돼 조사를 받고 풀려난 또 다른 남자 2명은 각각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거나 교통사고로 죽었다. 10차 사건 때도 용의자로 연행됐던 사람이 투신자살을 했다.

8차 사건 당시 (억울한 누명을 쓴) 범인의 음모를 뽑아 결정적 공을 세운 최모 순경도 훗날 초상집에 가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당시 경찰 수뇌부에 대한 불만

그 당시 경찰 수뇌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형사가 아직도 경찰에 남아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현직 경찰관은, “당시 수사본부에서는 일선 형사들의 심증이나 보고 내용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들의 주관으로 수사를 지휘하는 경향이 강했다. 현장에도 나가 보지 않은 몇몇이 수사방향을 결정하다 보니 수박 겉핥기 식이 됐다. 심지어 비과학적 수사를 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하면 소문난 무당집에 빨리 가보라는 지시였다”고 당시 수뇌부를 성토했다.

3. 재심 결과는 (?)

이춘재가 벌인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1988년 8차 사건이 발생한 지 32년 만이다.

수원지법 형사12부는 2020년 12월 17일 살인 및 강간치사 혐의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확정했던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2019재고합17).

재판장은 “피고인의 자백 진술은 불법체포 감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로 얻어진 것이므로 증거능력이 없다.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피고인의 신체 상태, 범행 현장의 객관적 상황, 피해자 부검감정서 등이 다른 증거와 모순 저촉되고 객관적 합리성이 없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범행 현장 체모에 대한 감정결과와 경찰 진술조서 등도 피고인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 반면 이춘재의 진술은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증거와 부합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고 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경찰에서의 가혹행위와 수사기관의 부실수사 및 제출된 증거의 오류를 법원이 재판과정에서 발견하지 못해 결국 잘못된 판결이 선고되었고, 그로 인해 2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을 피고인에게 사법부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오늘 선고가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명예 회복에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했다.

윤성여는 1988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자택에서 자고 있던 박모 (당시 13세)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 재판에 넘겨졌다. 그 당시 21세였다. 1심에서는 범행을 인정했다가 2, 3심에서는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했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년간 복역한 후 지난 2009년 가석방된 그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2019년)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무죄가 확정되면 살인죄의 누명을 벗게되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해야 했던 20년에 대한 형사보상도 받게 된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윤성여가 종합편성채널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줬던 박종덕 교도관을 만났다.

당시 수사 담당자들은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윤성여를 상대로 강압적인 수사를 벌여 허위자백을 받아 냈고 검찰과 법원도 이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해서 그는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기에 이르렀다.

그가 말했다. “실제로 억울하게 만든 사람은 직접적으로 이춘재가 아니니까 검사와 판사가 더 밉다.”

그는 교도소 내에서도 흉악범으로 낙인찍혀 집단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해 수형 생활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러한 고초를 겪던 그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 교정공무원 박종덕 계장이었다.

그는 박종덕 교도관에 대해 “유일하게 나를 믿어준 사람. 그가 없었으면 나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수용 생활을 하던 그를 지켜본 박종덕 교도관은 그에게 “끝까지 살아야 한다. 살 방법은 인내심뿐이다”라고 격려하며 윤성여가 교도소 내에서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결국 그는 무기징역에서 감형돼 (청주교도소에서) 20년 만에 가석방 출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20년 만에 나온 감옥 밖 세상도 그를 잔혹한 흉악범으로 대할 뿐이었다. 윤성여는 출소 이후에도 사회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해 또 한번 좌절했다.

가석방되어 사회로 나왔지만 힘겹게 살아가던 그를 위해 박종덕 교도관은 취업을 도와주기 위해 나섰다.

출소 이후 힘들었던 생활과 관련해 그는 “오죽했으면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고 싶더라.”면서 당시 힘겨워하던 자신을 꾸짖고 붙잡아준 박종덕 교도관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출소 이후 자신을 문전박대하는 친척들의 모습에 서러웠다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4. 1989년 국과수에서 생긴 일 - 누가 왜 국과수 감정서를 조작했나?

화성 사건, 국과수 증거조작의 재구성

화성 8차 사건, 엉뚱한 사람 옥살이

수원지검 “국과수 감정서 허위 작성”

국과수 장 실장, 음모성분 감정 도입

당시 동료 “과학적 검증 안된 분석법인데

국과수에서 장 실장 혼자 우겨” 증언

경찰, 국과수에 윤씨 체모 감정 의뢰

국과수, 비교 시료 바꿔치기

바꾼 수치도 임의로 가감해 조작

경찰 ‘조작 부인’, 국과수는 침묵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여덟 번째 범인으로 지목된 윤성여.

그는 구속 수감되어 젊은 청춘을 꼬박 교도소에서 보냈다.

옥중에선 늘 누군가를 향해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요. 그의 호소는 교도소 담장을 넘지 못했다. 22살에 강간 살인죄로 단 죄수번호는 청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며 뗄 수 있었다. 출소 후에도 10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그제서야 진범이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 자백을 했다.

수원지검은 과거 법원이 그의 범죄를 유죄로 판단할 때 핵심 증거로 삼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서가 허위로 작성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과수 감정관이 수치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깨고 감정서를 조작한 것이다.

과학 증거라는 신화 앞에 경찰도 검찰도 법원도 교묘히 조작된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숫자에 속아 넘어갔다.

이춘재는 1994년 1월 13일 집에 놀러 온 처제를 강간 살해한 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다. 부산교도소에 있던 그가 지난 10일 수원구치소로 이감됐다. 수원지검의 어떤 검사가 조사실에서 이춘재와 마주 앉았다. 그는 화성 8차 사건 범행 상황을 체념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그러나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서울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1988년 9월 16일 금요일 오전 6시50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한 가정집에서 중학교 1학년 여학생 박○○(당시 13살)가 자기 방에서 목에 멍이 들어 숨진 채 발견됐다. 진안리에서 차로 20분 거리인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안○○의 시신이 발견된 지 고작 9일 만에 추가 범죄가 발생한 것이다.

경찰은 화성 8차 사건 현장의 박의 시신에서 용의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 10점을 채취했다. 사건 발생 11일 만인 9월 27일 국과수에서 넘어온 그 음모의 혈액형 감정 결과가 B형으로 나오자, 경찰은 혈액형이 B형인 사람 중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음모를 채취해 외관상 형태가 그 음모와 비슷한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남성의 음모가 대부분 꼬불꼬불한 형태라서 구분이 쉽지 않았고 당시 국과수 혈액형 판정 방법의 정확성은 크게 떨어졌다.

“1980년대만 해도 유전자 검사가 도입되기 전이라 감정 의뢰가 들어오는 샘플의 개인 식별 문제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당시 국과수 혈액형 판정법은 ABO식이라 식별력이 상당히 떨어졌다. 그 판정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누구 잘못이라기보다는 그게 그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감정기관이었던 국과수의 수준이었다.”

화성 8차 사건 발생 직후인 1988년 10월부터 수사본부 인력을 잇달아 교체 보강하던 경찰은 한 달 뒤인 11월 유○○ (현재 미국 거주) 경정을 화성경찰서 수사과장에, 대공 수사를 해왔던 최○○ (교통사고로 사망) 순경을 화성서 수사과 형사계로 배치했다. 유 경정은 감정서를 조작한 국과수 직원과 업무 논의를 한 인물이고, 최 순경은 화성 8차 사건 조사 때 윤성여를 폭행 고문한 인물이다.

1989년 1월부터 경찰은 국과수와 논의해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범인 확인 작업에 적용하기로 한다.

당시 국과수에서 화성 8차 사건에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도입한 사람은 이화학 3과 실장이었던 장○○였다. 화성 8차 사건의 조작된 감정서를 작성한 인물이다. 이 감정법은 지금껏 화성 8차 사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됐다. 당시 국내외 법의학 논문에도 실린 적이 없는 감정법이었다.

“장○○의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기억하나요?”

“그때 장○○가 연구비를 받아 원자력연구원과 공동연구를 추진했어요. 모발 속 원소를 측정해 개인 식별하는 방법을 도입하려 한거죠. 그 연구과제 연구비 지원 심사회의에 내가 들어가 굉장히 반대했습니다. 그거는 방법 자체가 잘못됐거든요.

그때 여러모로 논의가 오갔지요.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다.’ ‘기존 연구도 논문도 없다.’ ‘방사성 측정은 모발이 굉장히 오랜 기간 유지됐을 때 가능하다. 고고학에서는 그런 측정 방법이 있다. 화석처럼 아주 오랜 기간 (원소가) 쌓인 것은 된다.’

내가 그것은 아이디어 자체가 잘못됐다고 했는데도 그가 계속 우겼습니다. 정말 심하게 반대했던 거는 정확히 기억합니다.”

“장○○가 원자력연구원에서 온 음모 분석 결과를 임의로 조합했다는데……”

“그분 성격이 원래 그런 편이다. 평소에도 데이터를 주물럭주물럭했다. 국과수 안에서도 혼자 우겼다.”

“그렇게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국과수 과장급들은 대졸 출신이 세 명 정도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고졸 출신이었다. 그는 대졸 출신으로 물리학 전공인데 전공이 애매했다. 국과수에서 전문으로 맡은 검사 파트가 없었다. 그러니 고졸 출신 과장들이 그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못 하고 있냐’며 윽박지르기도 했다. 주된 역할이 없다 보니 뭐라도 하나 해야 했던 위치였다. 항상 본인 자리의 불안감이 좀 있었다.”

“수치를 조작한 감정서를 국과수 결재 과정에서 윗사람이 걸러내지 못하나?”

“국과수 전문 분야는 누구도 그 결과를 논쟁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감정서에 일단 쓰면 위아래 아무도 터치를 못 한다.”

검증 안 된 감정법

그는 국과수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지시로, 왜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법을 느닷없이 화성 8차 사건에 적용했던 걸까?

경찰 의뢰로 시작되는 국과수 감정 업무 절차의 특성상 그가 화성 8차 사건을 담당한 화성경찰서 수사과장 유 경정과 어떤 논의를 했는지가 가장 큰 의문으로 남는다. 그 당시 업무 파트너였던 유○○는 2005년 퇴직한 뒤 이민을 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수원지검은 최근 귀국해 조사를 받으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1989년 1월 말에서 2월 초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 의뢰와 회신이 경찰과 국과수, 원자력연구원 사이에서 오갔다. 3월 말까지도 몇차례 감정이 이뤄지지만 소득이 없었다.

하지만 국과수 이화학 3과 실장 장○○은 감정서에 ‘현장 음모와 윤성여의 음모는 동일인 음모로 볼 수 있음’이라고 썼다. 이 감정서를 근거로 경찰은 윤성여를 체포 조사해서 억지 자백을 받은 뒤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그를 살인 강간치사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30년이 지나 이 국과수 감정서가 허위 작성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수원지검은 그 당시 국과수 감정서에 사용된 사건 현장에서 채취한 음모와 윤성여의 음모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결과는 다른 사람 2명의 음모 수치를 갖다 쓴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이들 음모 성분 수치도 최대한 비슷하게 나오도록 조작됐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채취한 음모의 성분 수치는 원자력연구원이 분석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 가동할 때 테스트용으로 쓰는 일반인 음모의 성분 수치였고 윤성여의 음모 성분 수치는 다른 용의자의 것이었다.

게다가 엉뚱한 두 사람의 음모 성분 수치도 편차가 크게 나는 경우 큰 수치는 낮추고 낮은 수치는 높이는 방법으로 두 음모 수치가 비슷하도록 임의로 가감해서 편차를 줄였다.

(허위 조작된) 국과수 감정서 앞에 당시 화성 8차 사건을 수사한 경찰을 지휘했던 수원지검의 최○○ 검사 (현 변호사) 역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한 검찰 조사에서 최 변호사는 “당시 너무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한다는 검찰 내부 의견과 함께 보강 수사의 필요성이 있어 약식으로 현장검증을 추가로 했다”고 진술했다.

수원지검은 국과수 감정서 조작 사실을 발표하며 “사건의 종국 처분은 검사가 한다. 수사 검사가 감정서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과오가 있는 것은 맞다. 최 변호사 조사 결과 국과수 감정 결과가 일치한다고 하니 그것을 믿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긴 했지만 (조작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국과수의 30년 침묵

국과수의 윤리헌장에 의하면, ‘우리는 오로지 과학적 진실만을 추구한다.’고 되어있다.

국과수는 지금 침묵하고 있다.

국과수 대외협력 쪽 한 관계자는 “당시 조작이나 오류 등에 관해 현재로서는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라 공식 입장이 없다. 실험 데이터는 국과수 원장이나 담당 부서가 설명할 계획이다. 언제 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과수의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법원에서 증거로 채택된 것은 화성 8차 사건 법정에서다.

참고 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이춘재 연쇄살인사건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심층 취재 「(하승균 경정 인터뷰) ‘화성 연쇄살인’ 공소시효 만료 맞는 형사들의 분노」, 「월간조선」2006년 1월호. (배한진 기자 bhj@chosun.com)

「“화성 연쇄살인범 죽었을 것, 자살할 놈은 아니고…”」, 중앙일보 2015.9.26. (유성운, 박병현 기자 pirate@joongang.co.kr)

「“조사했는데” … 화성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수사망 어떻게 빠져나갔나」, 중앙일보 2019.9.25. (최모란, 최종권 기자 moran@joongang.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30년 전 그날 화성, 누가 왜 국과수 감정서를조작했나」, 한겨레 2019.12.28.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

(본문 제4항 ‘1989년 국과수에서 생긴 일’은 이 기사에서 거의 전재한 것이다. 김정필 기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싶다.)

「‘이춘재 8차사건’ 윤성여씨 “유일하게 날 믿어준 교도관”」, 서울신문 2020.11.19.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 누명 윤성여씨, 32년 만에 재심서 “무죄”」, 법률신문 2020.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