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특별호(통권 58호)

[작가가 찾은 작가]

작품&작가의 변

이민호

<시>

목리(木理)

봄이 오는 소리 듣지 못하여도

가슴 속에

칠성판에 올려 질 알 몸 위에

부끄러움 박힌

잔물결 부딪히는

소목(小木)의 꿈

큰 집은 짓지 말자는

마음

오동나무 궤짝 속에

어둡게들 모여 있다

무너진 문짝을 열면

느닷없이

뛰쳐나가는 눈물방울들

눈부신 위에

응어리

원시가족

둘러 앉아 한 송이 포도를 나눠 먹으며

조금 있으면 우리 모두는

자줏빛 혓바닥을 갖게 될 것이라고

어린 것들이 반달 같은 혀뿌리를 길게 빼고

너도 어서 내놔라 아빠야

너도 어서 내놔라 엄마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을 테다

춤추며 노래하며 발광하는 가을

집은 왕십리 산동네

재개발지역

조금 있으면 우리 모두는

푸코와 데리다

어린 딸년의 친구 엄마가 아기를 가졌다고 햄스터 두 마리를 대신 키워 달라 부탁한 것은 폭염이 시작될 무렵. 새 생명에게 광기의 역사와 자기모순에 빠진 언어로 새 세상을 보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눈물겨운 모정. 원형 감옥 속에서 수컷 한 놈은 폭력이라는 이름의 시를 쓰며 쳇바퀴를 돌리고 또 한 놈의 수컷은 돌출된 앞니로 그 시를 발기발기 조각내 삼키고는 겨자씨 같은 관계들만 배설. 그러니 가을은 멀지 않으리. 지난 겨울을 뼈아프게 지내고 힘겹게 봄을 맞았던 인수봉 정수리가 뜨거운데. 어서 쇠창살을 깨뜨리고 딸년 몰래 햄스터를 놓아 주어야지. 주섬주섬 해체된 의미를 맞춰가며 수줍게 밤을 기다리면 환약 같은 햄스터 똥 알알이 지독히 냄새나는 거기서 무슨 우담바라가 사뿐히 피고는 삼천년 만에 우리 딸년의 눈물 어린 수레바퀴를 돌릴 그리운 사람들이 몰려오리라.

1943-1985-2010

아침 해가 뜨기 전 제국의 항모를 이륙한 108대의 가미가제 폭격기가 미드웨이 섬을 향해 정신없이 날아가고 있다. 1943년의 일이다. 해방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대열도 대오도 없는 빨간 고래밥만한 비행기 세 대를 100원에 사서 스타트 단추를 눌렀다. 살고 죽는 것이 삼세번이다. 한 손은 좌우 상하 때론 회전, 한 손은 손가락을 닭부리처럼 만들어 난타. 경련-무호흡증-망각, 이런 전략이 필요했다. 회피, 또 요리 조리 회피해야 사는 그런 몸짓으로 구십팔만 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어느 새 두 대의 비행기를 잃었고 나머지 한 대는 장렬한 최후를 생각했다. 두 손을 놓아 버렸다. 108개의 염주알이 한 알 두 알 고리를 풀고 떨어지는 1985년 잉어집 오락실 외로운 섬에서, 해방의 날이 요원하기 때문에 하나 둘 신념을 버렸다는 식민지 소식을 나 홀로 듣곤 했다. 1987년. 2010년 게임은 벌써 시작됐다.

깊은 산 속 소금 한 종지

한참을 내려 왔을 것이다 그늘과 그늘 징검다리 건너 소금쟁이 연 가시 가느다란 손발 길게 엎드린 자세로 멀리 밑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다 자라 무엇이 될 줄도 모르고 그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물줄기처럼 산 바위 부딪쳐 숨 한 번 골라 쉬고 강 언덕 저리 안고 잠시 몸 한 번 뒤척이고

하심(下心)이 아니고서는 바라볼 길 없는 곳에 문득 서 있다

어디까지 갔니

어디까지 밀려갔니

졸이고 졸인 마음

하얀 흙무덤

외발로 서 있는 詩

해저물녘 연립주택 공사판 여기 저기 삽들이 나뒹굴고 있다 파산했으리라 몇 놈은 드러누워 무딘 삽날을 뒤척이며 불꽃을 일으키고 또 몇 놈은 엎어져 맨 땅에 이마를 뭉개고 있다 신음도 없이 피 흘리지 않으며 모두들 내팽개쳐져 있다

그런 나날 속에서

손목 부러진 삽자루를 가만히 일으켜 흙무덤에 꽂아 주었다

<작가의 변>

내 시는 답답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래 전 이시영 시인은 내게 “시인은 착해선 안 된다” 고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말하였다. 무슨 뜻인지 새기지 못하고 그저 칭찬으로 알다 등단 15년이 지난 지금 그 말이 내내 저주였음을 알았다.

그러나 저주 받은 존재여서 다행이다. ‘서랍’과 같은 시집 속에는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열고 닫았던 서랍 속에는 ‘메타포’라는 기계적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그것은 순간적인 표현, 혹은 지나가면서 한 번만 사용되고 버려짐으로써 순간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을 표현이다.”

이런 말에도 귀가 솔깃하다. “장롱은 추억들의 소리 없는 소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매일 열리지 않는 것이다. 가슴을 터놓지 않는 영혼 마냥 그 열쇠는 문 위에 있지 않다.” 내 시에는 ‘장롱’ 속에 갇혀 울던 어린 시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