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토론회를 위해 의뢰받은 발제는 ‘문화예술정책의 변화와 문화운동진영의 대응방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대가 진을 치는 곳’ 또는 ‘대립하는 세력의 어느 한 쪽’이라는 뜻을 가진 ‘진영’이라는 단어는 전선이 수시로 이동하고 사라지고 분산되기를 반복한지 오래된 지금 상황에서 별로 적절치 않을 듯 싶어 빼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응’의 뜻은 ‘상황이나 상대에 맞춰 적절한 행동을 취함’인데, 이 역시 지금은 대응할 때가 아니고 proactive한 ‘실천’이 필요한 때란 점에서 발표제목에서 빼기로 하였습니다.
1. 문화예술, 개념과 역할
문화예술정책의 변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제가 이해하는 수준의 문화예술 개념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야 토론상의 혼란이 없을 듯 해서요. 문화예술은 크게 ‘양식으로서의 문화예술’, ‘가치로서의 문화예술’, ‘제도로서의 문화예술’, ‘삶으로서의 문화예술’로 나눠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식으로서의 문화예술은 흔히 이집트문화예술, 전통문화예술, 하위문화예술, 아시아문화예술이라고 이야기할 때의 ‘문화예술’을 의미합니다. ‘가치로서의 문화예술’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상황, 행위에 대해 “문화적이다”, “예술적이다”고 말 할 때의 ‘문화예술’을 일컫습니다. ‘제도로서의 문화예술’은 제도적․정책적 대상이 되는 창작자, 매개자, 향유자를 비롯한 창작품과 창작 및 발표의 공간과 교육, 유통의 시스템을 뜻합니다. 그리고 ‘삶으로서의 문화예술’은 문화는 “사람사이 소통”이라고 참여정부의 문화부장관이 말했을 때의 문화예술이며, 20세기 초, 발리에 당도한 서구의 문화인류학자들이 “문화예술은 그들의 삶이었다”고 말했을 때의 문화예술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발표하는 글의 문화예술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의미입니다. 저는 이 발표를 통해서 다가오는 시대는 문화예술에 네 번째 의미로서의 문화예술을 요청하고 있으며, 지금의 ‘문화운동’은 ‘문화예술이 삶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함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문화예술은 고래로부터 ‘생성’, ‘조화’, ‘해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만, 불안, 결핍, 과잉, 갈등, 증오, 연민, 슬픔, 아픔, 외로움 등의 혼란과 혼돈의 상황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창조’의 행위는 ‘생성’, ‘조화’, ‘해체’라는 성질을 가지고, 인류의 삶을 현재 머무는 곳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작동시켜온 동력이었습니다. 문화예술가는 ‘그대로의 세계’, ‘그럴 수 있는 세계’ 혹은 ‘그러해야 할 세계’를 작품(행위, 과정)으로 반영하고 표현함으로써 반성케 하고, 감동케 하고, 감응케 하고, 치유케 하고, 소통케 하고, 화해케 하고, 비판케 하고, 그리하여 현실의 부조리함과 갈등, 부족함, 혼돈스러움을 해체하거나, 조화시키면서 새로운 세계의 생성을 촉발해 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 ‘교육적’이고, ‘치유적’이며, ‘정치적’이고, ‘미학적’이었으며, 이러한 ‘공공성’은 문화예술의 존재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존재자체로 ‘공공적’이었던 문화예술에 대해 ‘공공성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여기저기서 자꾸 접하게 됩니다. “왜 아까운 세금을 자기 좋아서 작품하는 사람들에게 쓰냐?”는 것이죠. 그럼 이제 이 물음을 안고 문화예술이 처한 환경을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문화예술의 환경
최근 빌게이츠와 워렌버핏이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밝혔고, 이에 동참하는 미국의 갑부들이 약속한 기부 총액이 1,500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러한 운동을 세계갑부들로 확대하겠다는 기사가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이번 기부는 “자본주의가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빌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구상과 맞닿아 있다고 합니다. 인류는 경쟁을 통해 노동과 학습의 동기를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경쟁이 있었기에 이전보다 풍요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이며, 다만 이러한 경쟁은 결국 누군가 이길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러면 경쟁의 게임이 끝나버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일할 동기를 갖지 않게 되니, 이긴 사람이 획득한 자원을 ‘강구야!’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에게 분배된 자원으로 다시 경쟁을 하면서 보다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 말입니다. 혹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드디어 ‘생산성을 높여, 인류를 더 풍족하게 하자’는 근대기획의 끝을 보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컨베이어 시스템에 기계화된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거대한 공장을 짓고, 수 천 명의 아이들을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모양의 건물에 모이게 해서 같은 책으로 1교시 땡, 2교시 땡 하면서 공부시키는 학교를 짓고, 대규모 단일작물재배가 용이하도록 토지를 구획하고,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편리해지도록 항만과 도로, 시장을 지어온 근대사회의 신화가 생산과 분배의 관계와 과정의 민주성이나 인간소외, 생태계파괴 등에 대한 문제는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드디어 그 허무한 결론을 보여주는구나 하는 것 말이지요. 어쨌든 통제를 거부하면서 ‘질서 안에서 질서의 균열을 일으키고’, ‘질서 밖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문화예술의 입지는 이러한 ‘효율성’과 ‘생산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얼마나 돈 되는가?’의 가치로만 평가되는 것이지요. ‘컬처노믹스’와 ‘창조․문화산업’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예술의 시장화와 산업화가 자행되는 것이지요. 이제 이러한 세계적 문화환경의 변화에 대해 정책의 흐름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3. 문화예술정책의 변화
군사독재정권이후 들어선 김영삼 문민정부(1993~1998년)가 내세운 정책은 ‘정보화’와 ‘세계화’, ‘지역화’였습니다. 초고속 인터넷이 동네와 가정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영화, 사진, 문학 등의 아마추어 인터넷 동호회의 생성과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핸드폰이 범용화되기 시작했으며, 우루과이라운드(1993)가 최종 체결됨으로써 생활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상품교역의 세계화’, ‘금융․자본의 세계화’가 이뤄지게 됩니다. 농산물을 비롯한 미술품 거래, 출판․유통, 대중문화, 영상․방송 등의 점진적 완전 개방 역시도 이때 합의된 것이지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통해 지방자치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지자체가 문화예술 예산의 자기편성권을 갖기에 이르고 1997년 최초의 지자체 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이 설립되었으며, 자치단체 주최의 문화축제가 활발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시기 고삐 풀린 국제금융자본은 아시아 각국을 헤집고 다니며 경제적 충격을 초래하였고, 특히 우리나라는 1998년 IMF 구제금융신청이라는 극단의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1998~2003)의 문화적 기치는 ‘문화의 시대’였습니다. ‘새로운 천년’을 ‘문화의 시대’로 개념화 하고, 지식기반정보화사회로 전환하는 세계적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우리사회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문화예술’과 ‘지식정보산업’을 상정하면서 문화예술 1%를 확보하였고, 이는 정권창출에 기여한 문화운동진영과 주로 홍대와 대학로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신세대, X세대, N세대, 월드컵세대라 불리는 새로운 문화세대의 성장과 더불어 꽤나 유효하였습니다. 하지만 정권 초기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정책’은 행정관료제와 IMF 지원상황을 조기 종료한 성공의 경험에 기인한 경제적 논리에 가로막히며, 후기로 가면서는 ‘손바닥길이’, ‘선택과 집중 정책’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문화예술이라 쓰면 문화산업이라 읽고, 문화도시라 쓰면 문화관광이라고 읽는 일이 이 당시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노무현 참여정부(2003~2008)의 문화정책은 정권 초기부터 민간 전문가의 참여로 완성된 문화비전 <창의한국>, <새예술정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화예술의 생활화’, ‘삶의 예술화’, ‘제도의 민주화’, ‘예술단체의 전문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삶의 질’을 일컫는 ‘어메니티Amenity’ 개념이 정책 용어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문화예술교육’과 ‘문화예술전문법인’이 제도화 되었습니다. ‘지역문화예술’과 ‘공공예술’에 대한 정책적 관심과 지원이 많아졌고, 역대 정권의 정책도구로 활용되어 온 문화예술위원회를 예술인들의 자율적 합의기구로 전환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율권을 갖게 된 문화예술위원회는 재정분야에 있어서도 자율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됨으로써 오히려 정책기능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참여정부의 초기 문화정책은 극단으로 치닫는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흐름 앞에서 지지기반이 되었던 문화예술인들의 정책적 협력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먹고살기부터’라는 시장중심의 논리에 압도되면서 ‘문화산업활성화정책’을 전면화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명박 실용정부(2008~)의 가장 큰 특성은 ‘지표성과주의’와 ‘유통’입니다. 모든 정책과 사업 결과의 성공지표를 상정해두고, 그러한 성과적 지표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과정상의 문제는 극복할 장해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결과적 지표를 시민들도 성공의 측도로 여기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4대강 수질개선사업의 경우, ‘물자가 4대강을 통해 이동토록 하고 유역을 개발한다’는 정치적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전체로서의 생태계의 훼손이나 시민사회단체의 반대는 으레 있을 수 있는 문제이므로 거기에 연연하기보다는 앞으로 ‘로봇물고기’가 보내올 지표 측정치가 수질상태가 양호한 것으로만 나오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로봇물고기’로는 백 년이 지나도 측정치 못할 무기질의 문제나 종다양성의 문제, 지속가능성의 문제, 4대강 유역을 기반으로 삶을 일궈온 사람들과 문화유산의 문제 등은 간과한 채, 온갖 정책수단을 동원해 맑아진 수질 지표만을 홍보하면서 시민들도 이 사업이 성공한 것으로 믿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명박 정부에는 별도의 문화정책이라는 게 있기 어렵습니다. 문화예술이 정부의 경제적 성과지표 달성에 공헌하는가 아닌가와 공헌토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가만 남게 됩니다. 공공기관장 인사정책이 그러하고, 언론 방송과 미디어 통제를 골간으로 하는 정책이 그러하며, 4대강 유역 개발 사업에 문화가 공헌토록 하기 위해 가칭 ‘국제예술자유지대’ 같은 걸 짓자는 안이 나오는 것도 그렇습니다. 실용정부의 또 다른 특성이 ‘유통’이라고 한 것은 ‘소통’은 쌍방향을 전제로 한다면, ‘유통’은 일방향이라는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이전 정권이 ‘소통의 실패’를 겪었다면, 지금의 정권은 ‘소통의 부재’ 상황이라고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문화정책의 변화를 기술하면서 저는 어떤 정권도 세계적인 문화환경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봅니다. 지금의 문화예술이 놓인 상황은 더 이상 정권의 이념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과연 후기로 가면서 문화산업활성화 정책을 전면화하게 된 노무현 정부가 ‘소통의 실패’를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문화예술 상황이 좀 더 좋아졌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의 존재기반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흐름에 휩쓸린 한 국가의 문화정책이 마련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적 흐름을 거스름으로써 지금의 물질적 풍요로움은 잃어버릴지라도 그때에야 비로소 양심에 거스르지 않는 삶의 풍요로움이 가능함을 깨달은 한 단계 성숙한 시민들이 다수가 될 때야 비로소 쟁취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4. 작가의 존재기반
이제 작가가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과 문화운동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작가의 존재기반은 저는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연적 존재로서의 ‘먹고살기’이고, 둘째는 사회적(직업적) 존재로서의 ‘재현과 표현’이며, 셋째는 문화적 존재로서의 ‘자유’입니다. 이 세 개의 기반 중 어느 하나라도 잃어버린다면 작가는 더 이상 작가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굶어 죽어도 자존심을 버리지 않고 살다가 쓰러지거나, 작품보다는 언설과 타협, 이해관계로 살게 되거나, 세상이 다 그런 거라고 자위하며 영혼마저 속인 채 작가인 척 살게 됩니다. 앞서 언급했듯 작가는 ‘그대로의 세계’, ‘그럴 수 있는 세계’ 혹은 ‘그러해야 할 세계’를 작품(행위, 과정)으로 반영하고 표현함으로써 반성케 하고, 감동케 하고, 감응케 하고, 치유케 하고, 소통케 하고, 화해케 하고, 비판케 하고, 그리하여 현실의 부조리함과 갈등, 부족함, 혼돈스러움을 해체하거나, 조화시키면서 새로운 세계의 생성을 촉발함으로써 주위를 불편하게도 하고 행복하게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적으로 이것이 불편한 이들은 작가를 추방하려고 했고, 행복한 이들은 그들 가까이 있고 싶어 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기꺼이 작가의 존재기반을 위해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맹목적 신자유주의로 적대적 경쟁과 개인화, 생태계의 파괴가 한계를 넘어 인류의 지속가능한 삶에 위협이 되고 있는 지금 시대에 작가들로 인해 행복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중심을 해체하고, 아픈 곳을 돌보고, 추한 곳을 정화하고, 감춰진 곳을 드러내고, 단절된 곳을 이어주면서 ‘아름다운 조화와 전복의 정치’를 구사하는 작가들은 누구의 행복이 될까요? 문화예술운동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5. 문화예술운동
근대사회의 끝자락에서 ‘신자유주의’의 ‘생산성’과 ‘효율성’과 적극 조응키로 한(아니 더 나가기로 한) 지금의 정권은 분명 ‘작가’들이 있어 불편할 것입니다. ‘실용’적 측면에서 ‘효율성’과 ‘생산성’을 무척이나 떨어트리는 존재들일 테니까요. 지금의 정권에는 ‘성과지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래서 정책홍보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예술이 필요합니다. 작가의 양심으로도 정권에 협력하는 일이 세상을 위한 일이고, 사람들의 삶의 질에 기여하는 일이라는 판단이 든다면 적극 협력하면 될 일입니다. 이것이 지금 시대의 문화예술운동이 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정권에 일말의 희망을 안고 조금은 더 많은 분배를 바라며 열심히 노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는 공장에서 잠시나마 지친 심신을 달래는 위안의 노래가 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일들이 지난 몇 백 년 동안 서서히 진행되어 왔으며, 작가의 존재기반도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고흐는 그렇게 귀를 잘랐고, 버지니아 울프는 또 그렇게 강물에 몸을 던졌으며, 백남준은 사기꾼임을 스스로 고백하게 되었지요.
저는 지금의 문화예술운동은 정권에 대응하기보다는 무시하기를 바랍니다. “싸우며 닮는다”든지 “싸우며 강화된다”든지 하는 말의 뜻은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허무한 결말을 담은 빌게이츠의 ‘창조자본주의’처럼, 신자유주의라는 지구적 게임이 얼마나 시시하고 재미없는지를 이미 알아채기 시작한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이후를 위해 자본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렇게 자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다보면 가까운 시간 내 지금의 세계질서는 알아서 내부로부터 해체되면서 끝을 맺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끝날 ‘보이지 않는 손’이나 ‘소통말고 유통하겠다’는 정권과 싸우려 하지 말고 ‘삶으로서의 문화예술’, ‘문화예술이 생활이 되는 마을’의 작가로 사는 길을 문화운동의 차원에서 적극 전개해보기를 바랍니다. 신자유주의 이후의 삶을 준비해보고자 하는 문화예술운동 앞에는 두 개의 길이 놓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재미있고 신나게 가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함께 가는 길입니다. 이 둘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서로 다른 길일 것이며, 이후에는 같은 길일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내 작품이 어떻게 이용되든 상관치 않는다면 얼마간 재미있고 신나게 갈 수 있지만, 함께 가기는 어려운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함께 가려 하면 공동의 선을 정해야 하고 공동의 선을 지키려할수록 개인의 삶은 숨막히다고 느끼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전자는 감성과 쾌락 영역의 길이고 후자는 이성과 도덕 영역의 길입니다. 근대사회, 토건개발사회, 자본주의사회, 소비사회 그리하여 신자유주의로 치달은 현재 사회 이후의 삶이란 분명 이 두 영역이 만나는 곳에 세워지는 마을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재미있고 신나게 서로 도우며 함께 사는 게 삶이 되는 마을 말이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버리고 굳이 새로운 마을을 세울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영역이 통합되는 창의로운 삶은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서 문화예술의 존재기반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문화예술인들은 이미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한 성미산마을 극장의 배우나 극작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월선리 마을’이나 ‘가시리 마을’ 등 이미 마을로 들어간 수많은 작가들과 함께 ‘마을안팎의 마을’을 이루며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율면이라는 작은 동네에 들어가서 마을 노인들의 농사도 돕고, 동네 아이들 공부도 해주고, 마을 유기농가와 도시가구의 직거래를 맺어주고, 그러면서 자기들도 농사를 짓기 시작한 콩세알의 젊은이들과 함께 마을 작업장(글방)을 짓고 자활공생의 삶을 살아봐도 좋겠지요. ‘일상창작예술’이나 ‘공공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하면서 천천히 마을이 되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을 한 켠에 세상으로 열린 광장을 만들거나 이미 있는 광장이라면 지켜가면 될 것입니다. 세상으로 열린 광장은 상호적 돌봄과 생산의 공유, 그리고 공동체성으로 자칫 폐쇄적이기 쉬운 마을을 환대와 호혜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토록 하면서 작가들의 사유와 표현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장이 되도록 해 줄 것입니다. 최근 제가 있는 하자센터에서 ‘지속가능한 지구에서의 삶을 위한 아이디어와 열정을 가진 교사, 문화예술가, 인문학자, 청소년들을 위한 교류와 협업의 광장’을 ‘허브’라는 이름으로 짓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 열린 광장이 있는 마을을 이루면서 자본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삶을 사는 동안 우리는 그동안 시스템에 의존하면서 잃어버린 ‘더불어 사는 감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며, 쾌락과 현실이 조화되는 문화예술로서의 삶을 살면서 미적으로 한 단계 성숙한 시민이 될 것이며, 여기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가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큰 불로 번지게 될 것입니다.
문화예술이 삶이 되도록 하는 것, 삶이 문화예술이 되는 마을을 가꿔가는 것, 창의성과 우정을 나누기 위해 서로의 마을을 수시로 방문하는 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환대의 광장을 지키는 것과 만드는 것, 이것이 지금의 문화운동이 되면 좋겠다는 제안으로 제 발제를 요약하면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을 여는 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