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여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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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특별호(통권 58호)



[소설]


처용무



이후경



                                  1

에헤라디여, 이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서라벌 달 밝은 밤 지치도록 놀다 들어갈 제, 나를 따라온 달빛이 열어젖힌 방문으로 쏟아져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이녁의 가랑이가 눈부시게 빛날 제, 희디 흰 그것에 시커멓게 얽힌 털투성이 굵은 가랑이, 한 치의 의심도 가질 수 없는 수컷의 가랑이. 그 시커먼 것을 본 순간 내 온몸을 관통했던 전율을.

밤새들도 울기를 멈춘 야심한 시각, 내 기쁨을 나눌 벗이라곤 달빛밖에 없었네.
행여 그대들의 농밀한 잠을 깨울까, 나는 발소리를 줄여 뜨락으로 빠져 나왔지. 달빛이 간질이듯 내 어깨를 툭, 치자 나도 모르게 저절로 어깨춤이 덩실덩실, 달빛은 개울이 되어 흐르고, 내 기척에 깬 소쩍이와 쏙독새가 장구 치듯 장단을 맞춰주니 나는 한 마리 학이 되어 춤을 추었다네.
갓 돋은 어린 대추 이파리들이 달빛에 반짝이고, 송화 가루 듬뿍 얹은 소나무 그림자는 나와 짝이 되어 함께 춤을 추었지.
내, 마음 홀려 정을 맺은 여인이 어찌 하나 둘이련만 이녁보다 귀한 여인은 천지신명께 맹세코 없었으니 그런 연유로 이녁과 나, 정한수 앞에 부부로 맺어져 살아온 것이 아니랴.
허나 정(情)이란 굵은 오라. 내가 품는 정도 오라요, 그대가 쏟는 정도 오라이니 오라에 묶인 기쁨이 클수록 그것이 파고드는 고통도 짙어질 수밖에 없는 것.
이 몸은 바람의 넋, 바람이 오라에 묶일 리 없겠으나 살의 몸을 지닌 나는 이녁이라는 인연의 오라에 발목이 묶여 어느 사이 피멍이 들고 있었지.
그 굵은 오라가 달빛 받은 그대들 가랑이를 보는 것으로 이렇듯 단박에 느슨해졌으니 내 어찌 절로 어깨춤이 흘러나오지 않으랴. 덩더쿵 덩실, 얼쑤.

세상 어느 곳에도 잠시 머무를 뿐 뿌리박지 못하는 넋, 그러나 날개 없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나는 내 여섯 형님들과 함께 흐르는 바다에 실려 이 땅에 다다랐고, 인연의 실을 따라 헌강왕 앞에 나타나게 되었지.
저 머나먼 서역 땅에서 태어난 몸으로 바다를 향해 뻗은 작은 종주먹 같은 이 땅으로 찾아든 날, 나를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이곳 백성들의 입성이었네. 바람의 넋을 담은 옷, 그 옷을 입은 백성들은 온몸 가득 바람을 품은 채, 그도 모자라 춤을 출 때면 바람을 닮은 한삼까지 너울너울 날리는 것이었네. 내 태를 묻은 땅의 옷들도 그러하였지. 옷에 홀려 돛을 접고 닻을 내려 이 땅에 잠시 머물러볼 염(念)을 품었다면 억지라 하겠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만을 본 것이 아니었네. 내 눈에는 먼 훗날 이 땅의 모습도 보였지. 도포 자락 휘날리는 먼 훗날의 나라, 아직 오지 않은 그 시간까지도 나는 보았던 것이라네. 그 속에 나는 바람의 자손들을 뿌리고 싶었지. 내 넋의 조각들을 품은 나의 자손들을.

새로운 땅의 아름다운 기운에 절로 신명에 겨워 춤추던 나를 왕은 붙잡고 싶어 하였네. 그리하여 왕은 내게 급간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내 마음을 붙들 여인을 안겨주려고 하였지.
왕의 명령으로 내 앞에 펼쳐지던 수많은 가인(佳人)들의 초상화.
시종들이 차례차례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보이던 때, 이어지는 아리따운 여인들을 지루하게 바라보던 내 앞에 한 장의 그림이 새로 열렸다네. 불현듯 눈앞이 환해졌지.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그림 앞으로 홀린 듯 다가갔네.
붉은 국화가 피어있는 가을 뜨락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뒤돌아 앉아 있었지. 앉은 채 고개만을 돌려 나를 바라보던 그 나른하면서도 서늘한 눈길. 그림 밑으론 추정한묘(秋庭閑猫)라 적혀있었네, 가을 뜨락의 한가로운 고양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여 사색이 된 시종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네. 놀라 호통을 치려던 임금의 낯빛도 가라앉았지. 귀신의 춤까지 따라 출 줄 알던 헌강왕이었으니 얼추 내 마음을 짐작하였을 것이네.
“이 그림이 마음에 드는가?”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연신 끄떡이며 빼앗길까 겁내는 아이처럼 그것을 소중히 품에 안았지. 그는 껄껄, 큰소리로 웃더군.
“역시 처용은 남다르군. 하하, 다들 마음을 놓아라. 급간이 좋다 하니 모든 허물을 용서하겠노라.”
다른 그림은 볼 것도 없었네. 초상화를 올리라는 어명에 감히 세상의 어느 여인이 한 마리 축생을 그려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 흑묘(黑猫)의 나른한 호박(琥珀)빛 눈빛은 또한 어느 생에선가 한번은 만난 적이 있었던 눈빛 같았으니 더 이상 내가 다른 어떤 여인에게 눈길을 돌릴 수 있었겠는가.
임금이 놀리듯 말했다네.
“혹여 얼굴이 박색이라 이런 짓을 했으리라곤 생각지 아니하는가?”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지. 그럴 리는 없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네. 그의 얼굴 껍데기가 어떤 것이든 나는 이미 그 그림 한 장으로 내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으니.

그리하여 초례청에서 이녁을 처음 본 날, 이녁은 뜻밖에도 나를 향해 매서운 눈빛을 쏘아 보냈지. 고양이의 나른한 눈빛이 아니라 살기등등한 뱀의 눈빛.
하지만 절벽 끝에서 훌쩍 몸을 날릴 수 있는 이녁의 그 서늘한 결기야말로 내가 가장 마음을 빼앗긴 모습이 아니었던가?
잊을 수 없는 그 첫 밤을 시작으로 이녁과 함께 보낸 환락의 그날들을 어찌 한 자락이라도 흘려버릴 수 있겠는가?
이녁과 함께 흐르고 흘렀던 시간들, 이녁과 나를 잇는 인연의 따스함, 바람에 실려 떠도는 나를 그만큼이라도 끌어내려 묶어둔 것은 오로지 이녁의 힘이었거늘.
아름답고 황홀한 사람, 나는 이녁의 모든 것을 어여뻐 하였네. 아니, 지금도 이녁은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의 푸른 못. 이녁의 희디흰 허벅지에 엉켜있는 저 털북숭이 시커먼 가랑이가 그 푸른 못의 물을 더 깊어지게 함을 이녁에게 고스란히 전할 수만 있다면!

에헤라디여, 에헤라디여, 이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덩더쿵 덩실, 얼쑤.


                                       2

달빛 스민 창호지 위로 백로의 날갯짓처럼 허위허위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인다. 서방님의 춤사위. 소맷부리마다 바람을 그득 담고 잔뿌리 하나 땅에 내리지 않은 채 허공 속을 휘젓는 내 지아비의 춤사위.
처음 그의 춤을 보았던 날, 임금님의 행차 속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알아듣지 못할 말로 노래하는 그를 보고 장안의 처자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지. 그의 워낭처럼 크고 부리부리한 눈과 사천왕처럼 우람한 덩치는 그들을 두려움에 젖게 하기에 족했다. 길가에 남은 이는 장정들과 노인들과 개구쟁이 사내애들뿐 젊은 계집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기실 낮도깨비 같은 그가 오금이 저리도록 두렵기만 했다. 
그래도 내가 끝내 그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은 놀라움 때문이었다. 늘 조는 듯 세상일에 무심히 지내온 나였지만 그런 나에게도 그 광경은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 순간부터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인지도 몰랐다. 태산만한 덩치의 사내의 춤이 사뿐사뿐 꽃잎 위에 앉는 나비처럼 가벼운 것이 도통 믿기지 않았다. 산 도둑 같은 사내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허위허위 흐느적거리며 허공을 휘젓는 그 모습도 꿈인지 생시인지 싶었다.
그의 노랫소리도 그러했다. 바로 코앞에서 들리는 그 소리가 머나먼 저승에서 들려오듯 아득하기만 했다. 그의 옷에 달린 유리와 산호로 된 노리개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처럼 쟁그랑쟁그랑 맑은 소리를 내어 나는 정신까지 혼미했다.

그러던 한 찰나 어떤 억겁의 인연이 끼어들었는지 그의 눈길이 내 눈길과 마주쳤다. 그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으나 그 눈길이 지나가 머무는 곳은 내가 아닌 적막한 허공.
나는 숨을 삼켰다. 잘 벼린 비수에 스친 상처에서 망설이듯 천천히 피가 배어나오듯 서서히 저 깊은 곳 어디서부턴가 쓰라림이 밀려왔다. 그 사내를 사모하는 일은 꼭 그러하리란 짐작이 나를 옥죄었다. 그러하나 이미 늦은 일. 나는 그 순간, 퉁방울눈을 가진 그 무시무시한 사내, 처용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긴 것이었다.
그는 훗날 왕이 내민 미녀들의 초상화 속에서 엉뚱하게도 국화꽃 옆 검은 괭이 한 마리를 그려낸 여인네를 골라낸다. 그에게 그것은 도발적인 것에 대한 궁금증 정도였으리라. 하지만 내게 그것은 내 온 삶을 건 도박이었다. 나는 그를 처음 본 그때 이미 그의 아낙이 되리라 마음먹었으니, 그 숱한 아리따운 여인의 초상화들 속에서 그의 눈길을 끌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몇 밤을 새워 궁리하고 궁리했다. 숱한 궁리 끝에 내린 결정이 그 도박이었다. 도박은 도박이되 장대 위에 목을 걸어놓고 하는 도박.
다르지 않고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르다는 것은 눈썹을 초승달처럼 더 휘게 하고, 입술을 앵두처럼 더 붉게 하는 것으론 부족했다. 다르다는 것은 이승과 저승처럼, 달과 해처럼 완전히 다른 것이어야만 했다.
얼굴이나 자태가 다른들 얼마나 다르랴. 나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찾아야 했다. 서라벌 사내들이 나를 부르는 애칭이었던 추정한묘, 가을 뜨락의 나른한 고양이, 나는 그것을 택했다. 그들이 아무리 열정을 보여도, 조는 듯 마는 듯 조금도 달뜨지 않는 한 처녀를 그들은 그렇게 애정 어린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화공에게 그것을 부탁하자 화공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아기씨만이 아닌 내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하는 일이온데....”
화공의 말은 옳았다. 처용이 나를 택하지 않는다면 왕의 명령을 무시한 화공과 나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터였다. 그러나 내 목을 장대 위에 걸어놓은 판에 화공의 목 따위 걱정할 여유는 내게 없었다. 무조건 그를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믿었다. 그 사내는 반드시 나를 택한다, 그는 모란과 장미가 가득한 꽃밭에서 그 중 나은 모란, 그 중 어여쁜 장미를 고르느라 쩔쩔맬 소인배가 아니다, 그는 분명 전혀 다른 것을 찾으리라, 내가 본 그는 그런 사내였다, 그렇지 않다면 내 눈이 멀어 잘못 본 것이니 망나니의 칼질에 목이 끊어져도 좋았다, 하지만 그 믿음을 화공에게까지 억지 부릴 수는 없었으니 나는 말없이 화공을 바라볼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 큰소리로 웃더니 말했다.
“좋소, 내 한번, 아기씨를 위해 몸을 던져 보겠소. 허나 종이에 그려지는 건 한 마리 축생일지라도 내가 그리는 건 아기씨, 당신이오. 그러니 나는 괭이가 아닌, 아기씨를 보고 그려야만 하겠소.”
그리하여 목숨을 건 우리의 간절함은 그 그림 속에 살아있는 괭이 한 마리를 앉혀 놓을 수 있게 했다. 그 괭이는 진실로 나였다.

검은 고양이의 그림만으로 간택한 여자를 초례청에서 처음 보던 날, 그 사내는 워낭처럼 큰 눈을 더욱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목을 꼿꼿이 세운 채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온몸이 후들거려 서있기도 힘들었지만 이미 마음 뺏긴 사내 앞에서의 오기가 그 두려움을 눌렀다. 내 마음을 들키기 싫었으니까. 누구에게도 마음 빼앗겨본 적 없던 내가 근본도 알 수 없는 이역(異域)의 사내에게 그리하였다는 것이 속이 뒤틀릴 정도로 못마땅했으니까.
그 사내를 얻기 위해 장대 위에 목을 올려놓기까지 했던 집념은 어느 새 분노로 바뀌었다. 내 마음을 앗아간 자에 대한 노기, 마음 뺏긴 사내를 낭군으로 맞아들인다는 기쁨 따위는 깃들 틈조차 없었다. 초가을 독 오른 한 마리 뱀처럼 나는 스스로에 대한 노여움으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새파랗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내의 눈길을 맞받아쳤을 때 그의 얼굴에 떠오르던  천진한 미소, 한 점의 그늘도 없이 환하게 빛나던 그 미소는 내 노여움을 단박에 부끄럽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노려보던 사나운 눈길을 거두었다. 내 얼굴은 감이 익어가듯 천천히 붉어졌다. 노여움으로 간신히 막아놓았던 나의 열정은 그리하여 대책 없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지아비로 맞아 보내온 세월, 처음 본 순간의 내 불길했던 예감이 어긋나지 않는 것임을 깨달은 시간. 그의 그지없이 다정한 어루만짐 속에도 그의 넋은 허공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그의 온몸에 돋아난 셀 수없이 많은 터럭의 어느 한 올조차 내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날선 칼에 서서히 배어나오는 피를 바라보듯 고요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언제 햇살에 녹아 사라질지 모를 눈사람이라도 안고 있는 양 헛헛하고, 쓸쓸했던 그 세월.
그런 세월 속에 문득 몸엣것이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미 그와 지낸 세월이 다섯 해, 그간 태기가 없었다는 것이 외려 드문 일이겠지만 그와 나는 서로 어우러져 노는 일에 취해 잉태를 기다려 본 적이 없었고, 거기에 나는, 바람의 넋이 어찌 뿌리를 내리겠는가, 잉태에 대한 기대마저 접었던 터라 그 일이 뜻밖이고,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의원에게 맥을 잡혀 태기를 확인하자마자 당장 그 소식을 알리려고 나서던 나는 무엇엔가 뒷덜미라도 잡힌 듯 그 자리에 붙박힌 채 서고 말았다. 잉태를 알리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그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허공에서 허위허위 추던 춤을 멈추고, 이 땅위에 잔뿌리라도 내려 발을 붙일지도 몰랐다. 그것은 내게 끔찍하도록 선연한 유혹이었다. 아이는 갈고리가 되어 그의 넋을 파고들어 바람으로 떠도는 그를 붙잡아맬 것이다. 그렇게라도 그를 이 땅위에 매어두고 싶다는 욕심이 걷잡을 수 없이 나를 사로잡았다.
허나 그 길이 얼마나 참혹한 욕심의 길인지 또한 내 눈에는 또렷이 보였다. 그런 길 따위는 보이지 않는 눈먼 계집이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그도 아니라면 정인(情人)을 떠나보내고도 의연히 살아낼 수 있는 맑고 거룩한 여인이었더라면.
그 어느 것도 못된 나는 두 갈래 길 사이에서 망연히 서있어야 했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길이 날로 스산해지는, 술과 노래에 파묻힌 채 휘적휘적 밤거리를 헤매는 날들이 점점 늘어나는 그를 보는 막막함도 나의 심기를 더욱 어지럽혔다. 
마침내 나는 다시금 백척간두의 끝에 서기로 하였다. 오늘이 온 것은 그런 연유였다. 그와 어우러지던 이불 밑에 외간 사내를 끌어들여 그의 눈앞에 들이미는 일. 이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원하는 일인가, 칼을 들이대듯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런데 그는, 그토록 품 안의 구슬처럼 나를 괴어온 그는 저리 허위허위 기쁨의 춤을 추는구나. 아득한 허공을 보던 그 눈길은 한 점의 거짓도 스미지 않았던 것이었구나.
나의 애정이 그토록이나 저 사내를 묶었던가? 설령 그랬다 할지라도 제 계집이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긴 것을 두 눈으로 본다면 피가 거꾸로 솟으리라 한 줄기 기대를 하였건만. 서방질한 년으로 그 당장 끌려 나가 뭇매를 맞고 불에 타죽는 한이 있더라도 길길이 날뛰는 저 사내를 볼 수만 있다면 원도 한도 없으려니 하였건만.
저 사내가 그 일에 격분하거나 슬퍼하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그는 이 땅에 가늘디가는 실뿌리라도 내리고 있는 것일 터이니 나는 잉태의 사실을 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저 사내의 춤사위에는 기쁨만이 가득할 뿐이다. 한 점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환희의 춤. 
깨끗이 진 것이다. 땅의 나라 다른 지아비들 같으면 펄쩍 뛰고 칼부림을 하여도 개운치 않을 그 자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저 사내는 정녕 바람의 나라 백성이던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내로구나.

“저 춤추는 그림자가 그대 낭군의 것인가?”
내 옆에 누운 사내가 묻는다. 내 사랑을 위해 나와 함께 목숨 걸어주었던 그 화공이 이번에도 다시 한 번 나를 위해 목숨을 걸어주었다.
어허허, 그대를 위하는 길은 어째 매번 장대 위에 목을 거는 일이란 말이오? 그는 그렇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흔쾌히 나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대는 참으로 기이한 사내를 얻었군. 그대 같은 여인이 탐낼만한 사내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둘둘 말린 화선지를 풀고 먹을 갈아 춤추는 서방님의 그림자를 종이 위에 옮긴다. 덩더쿵 덩실, 하얀 종이 위에 그림자의 내 지아비가 춤을 추고 있다.
저 멀리 깊은 산골에서 고라니가 통곡하듯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것이 발정의 신음 소리라는구나. 저 여리고 겁 많은 짐승은 발정조차 저리도 애달파야 하는 것인지.


                                         3

에헤라디여, 이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내 입에선 절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네.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이뇨.
본디 내 것이다만
앗긴 것을 어찌하리.

덩더쿵 덩실, 노래와 춤이 달빛 아래 얽혀 그대들의 가랑이처럼 즐거워하고 있네. 노래와 춤에 취해 나 홀로 몰아지경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내 눈 앞에 덥석 무릎을 꿇는 저 검은 그림자는 무엇인가.
“한번 뵈옵고 싶었소.”
검은 그림자가 말을 하는군. 그러나 나는 내 춤을 마저 추고 싶어 그에게 대꾸하지 않네.
“용서를 빌지는 않으리다. 이것은 당신이 원했던 일일 터이니.”
그제야 나는 춤을 멈추고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네. 그가 그대와 얽혀있던 가랑이의 주인임을 비로소 알았지. 
“나는 추정한묘의 그림을 그렸던 화공이오. 오늘 또 한 장의 그림을 그렸으니 받아주시오.”
그가 고개를 들며 품안에서 한 장의 그림을 꺼내 내게 내미네. 나는 말없이 그 그림을 펼쳐 달빛에 비춰보았지. 먹으로 친 그 그림은 검은 그림자로 그려진 춤추는 남자의 모습이었네.
“나를 그린 것이오?”
“그렇소이다.”
“고맙게 받으리다.”
그러자 그가 희미하게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네.
“당신과 나는 이것으로 셈을 치르면 될 것이오. 허나 우리에겐 저 여인이 있소. 세상의 모든 귀와 눈이 주목할 저 여인.... 이 밤바람이 온 저잣거리에 퍼뜨릴 이야기..... 아무리 당신이 용납하고, 아니, 간절히 바래서 이루어진 일이라 한들 세상은 제멋대로 저 여인을 세치 혀로 쳐 죽일 것이오.”
나는 가만히 화공을 바라보았네. 이녁이 겪을 수모가 내 것으로 등줄기를 타고 내렸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네.
“당신 말이 옳소. 나는 여기 태생이 아니라 거기까진 생각이 못 미쳤소. 그렇다면 내 처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소?”
화공은 품안에서 다시금 그림 한 장을 내밀었네. 거기에는 내 얼굴의 특징을 과장하여 도깨비처럼 그린 귀면의 그림이 있었지.
“이 또한 나를 그린 것이오?”
“그렇소이다. 앞서 드린 것이 내 진심으로 당신을 위해 그린 그림이라면 이것은 세상에서 저 여인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그린 그림이라오.”
“나를 도깨비처럼 그린 것은 무슨 뜻이오?”
“그것은 당신의 얼굴을 무섭게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오. 오늘의 나는 역신이었던 걸로 해둡시다. 역신이 당신 부인의 미모에 혹해 당신의 모습으로 변해서 저 여인을 범한 것으로 말이오. 밤늦게 들어온 당신은 그 모습을 보고도 뜰로 나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그 관대함에 감동한 역신이 당신에게 무릎 꿇고, 당신의 얼굴을 그려놓은 곳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걸로 말입니다.”
나는 화공을 다시 유심히 바라보았네. 깊이를 알 수 없는 두 눈이 달빛에 형형히 빛나고 있었지.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저 여인을 살리는 길일 것이오. 당신은 역신까지 감동시킨 관대함으로 연년세세(年年歲歲) 그 이름을 전할 것이며, 저 여인은 남편에 대한 정조를 지키면서도 역신까지 매혹시킨 미모로 또한 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것이오.”
처음으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네. 내가 나의 기쁨에만 빠져 있을 동안 그 사내는 이녁을 걱정하고, 이녁을 지켜줄 궁리를 짜고 있었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네. 그가 외려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맙소, 라고 말한 뒤 훌쩍 담을 넘었지.
그러자 나는 불현듯 이녁이 그리워져 참을 수가 없었다네. 용암처럼 뜨거워진 몸으로 나는 이녁을 찾았지. 이녁에게 깊이 빠질수록 내 발목을 조여오던 오랏줄이 그만큼이라도 느슨해졌으니 나는 거칠 것이 없었네. 아직 다른 수컷의 체온이 채 식지 않은 이불 속에서 나는 온몸을 떨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내 속의 것을 쏟아내고, 이녁의 모든 것을 받았지.
 
그날 밤의 밤바람이 정말로 그 이야기를 퍼뜨린 것일까?
화공이 만들어낸 소문은 곧 서라벌 전체를 뒤덮었네. 사람들은 모두 내 도깨비 같은 얼굴을 집 앞에 그려 붙였고, 내가 부른 노래를 따라 부르고, 내가 춘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지.
그리하여 그대와 나는, 세세연년 이어 내려갈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네.


                                      4

그 밤, 졸지에 역신이 된 사내가 떠나간 이부자리 속으로 서방님은 다시 파고들어 왔지. 다른 어느 때보다도 그의 몸은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내 몸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열려 있었으니.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서방님 몸의 뜨거움은 내게서 풀려난 기쁨에서 온 뜨거움이며, 내 몸의 뜨거움은 그를 떠나보내는 슬픔에서 온 뜨거움이란 것을.
그는 풀려난 기쁨에 더 큰 정을 쏟았고, 나는 떠나보내는 슬픔에 더 짙은 정을 퍼부었다. 그리하여 그 밤은 불에 달군 쇠로 지진 듯이 우리 두 사람의 몸과 마음에 각인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와 나는 탈진하도록 서로를 찾고, 끝없이 정을 나누었다. 그에게는 시작이었으나 내게는 끝이었던 그 밤.
참으로 아둔한 사내인 처용, 계집의 마음 깊이에 무엇이 있는지 결코 모르는, 계집의 껍데기가 웃고 있으면 웃는 줄로 아는, 그 붉은 입술이 상냥스레 말하면 마음도 그리한 줄 아는 사내. 아니, 자신의 기쁨에 겨워 내 고통엔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을 터이겠지. 그것이 백척간두에서 뛰어내린 나의 진검승부였다는 것은 짐작조차 못하였겠지. 오랏줄이 풀린 자신의 기쁨에 무엇인들 눈에 들어오기나 했겠는가?
그저 내가 바람이 나 외간 사내를 끌어들인 것으로만 알았을 저 사내, 그토록 많은 밤을 품어 안고도 아낙의 깊은 속을 한 치도 알지 못하는 남자, 뿌리 내린 것만이 파고들 수 있는 법. 잔뿌리 한 올 내리지 않는 저 사내로선 몇 생을 살아도 모를 그것.
그 밤을 끝으로 나는 내 마음에 주렴을 내려버렸다.

밤바람이 온 저자거리에 퍼뜨린 그 소문은 나를 이 서라벌 최고의 절색으로 만들었다. 나는 정조는 정조대로 지킨 채 역신에게 범함을 당한 기묘한 역할을 하게 되었지. 화공과 내 지아비가 힘 모아 만들어준 그 정교한 계략은 공식적으로는 나를 지켜냈다. 세상은 나를 우러렀다. 임금님마저 국중나례 때 몸소 우리 부부를 대궐 안으로 불러 악귀를 쫓는 의식을 행하게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큰 세상은 나를 우러렀지만 작은 세상, 저잣거리 하나하나의 인간들은 나를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지. 나는 그들이 뒤에서 잘근잘근 씹어대는 것을 괘념치 않았다. 그럴수록 더욱 고개를 곧추 세우고, 가슴에 독을 품었을 뿐.
내 가슴의 독은 내 몸으로 퍼져나갔다. 내 창자는 스스로의 독에 녹아 짓무르고 삭아갔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질시가 묻었기에 더욱 독했다. 화공이 좀 더 세상의 속내를 헤아릴 줄 알았다면 나를 희생자로 만들었어야 했다. 역신은 강제로 나를 범한 것이어야 했다. 그랬다면 나는 질시가 아닌 동정을 받았으리라.
그런데 나는 한 군데도 이지러지지 않았다. 낭군인 줄 알고 사내를 받아들인 여인, 역신조차 반하게 한 미모, 저자거리 모든 여인네들의 독 묻은 시샘의 화살이 내 몸 마디마디마다 박히는 것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궁정 관리의 부인들이 모인 길쌈 모임 때였다.
참, 저기 급간 댁 마님은 길쌈을 잘 해서 보쌈도 잘 당하시나 보우, 한 부인의 말에 모두들 배를 흔들며 웃어대더니 한 마디씩을 덧붙였지. 난 이제 영감과 누울 때면 혹시 역신이 둔갑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우.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 몸뚱이가 훨씬 더 근질거리니 알다가도 모르겠어. 호호호, 다시금 웃음소리가 길쌈 판을 흔들었지. 처용 부인, 터놓고 좀 말해 봐요. 궁금해 죽겠어. 역신의 물건은 어찌 생겼다오? 힘은 어떻고?
나는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면전에서 당하는 것이 처음일 뿐 이미 저자 거리 뒤통수로 꽂혀오는 손가락질엔 익숙한 몸이었다. 제웅에 꽂히는 바늘처럼 그 말들은 내 온몸으로 박혀왔지만 나는 말없이 그것을 견뎌냈다. 마침내 그들은 머쓱해져 조용히 길쌈일로 되돌아갔다.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눕자 나는 미칠 듯이 통곡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내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솟아나오지 않았고, 내 목에서는 어떤 곡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내 몸은 펄펄 끓기 시작했다. 언젠가 처용이 말해준 그의 고향의 땅, 그 모래의 땅에 지는 해처럼. 어디든 물이 솟는 이 땅의 점잖고 온순하게 지는 해와는 달리 그것은 이글이글 타는 불덩어리라고 하였다. 제 몸을 식혀줄 물이라곤 없으니 그것은 더욱 붉고, 뜨거울 수밖에 없으리라. 내 몸은 물기를 잃고 타오르고, 몸속에서는 모래바람만이 몰아쳤다. 눈물도 곡소리도 쏟을 수 없었던 것은 내 염치였다. 일찍이 내 이부자리 속으로 외간 사내를 끌어들일 제 나는 이미 사람들의 발길질에 채여 죽어도 좋다고 각오하지 않았던가. 그랬으니 이제 와 그깟 수모에 통곡을 쏟아낼 수는 없었다.
오직 길길이 날뛰는 지아비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제 목숨을 장대 위에 올려놓았던 계집. 못나고도 못난 계집, 걸핏하면 목숨을 걸고 벼랑에서 뛰어내리기를 되풀이하는 어리석고 미욱한 계집, 허나 단칼에 죽을 수는 있어도 오래도록 난자되어 길게 죽어가는 꼴은 못 당하는 것이 또한 나의 성정인 것을.
기실 어떤 수모와 모멸도 그 밤의 절망에 비할 수야 있으랴. 그 달 밝던 밤의 아득함이야말로 내 온몸에서 단번에 모든 물기를 앗아간 것을.

봄이 마저 지나고, 여름이 다 가도록 나는 서천서역국 가는 길 갈증에 지쳐 쓰러진 낙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멀리 내친 채 홀로 앓고 앓았다.
와병의 끝에 이불을 털고 일어나자 뜨락에는 가을이 와 있었다. 국화의 향이 코끝을 맴돌았고, 맑은 가을바람에 혼까지 깨끗이 씻기는 듯싶었다. 온몸이 더운 물에라도 담긴 듯 나른하게 풀리면서 맥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긴 병중에도 한 방울도 솟지 않던 눈물이.
그 눈물을 통해 흘러내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무엇이 그 눈물을 통해 이 육신을 빠져 나갔을까? 아마도 그것은 독기였나 보다. 독사의 몸에서 독이 빠져나가면 그것은 이제 무엇에 의지해 고개를 쳐들 수 있을까? 빳빳이 고개 쳐들 그 독기가 없다면 독 없는 그 뱀에게 이 삶은 무엇일까?
어느 새 볼록해진 아랫배를 나는 쓰다듬었다. 이 뱃속의 아이는 내 아이다. 이 소중한 아이가 그의 숨통을 조이는 갈고리가 되게 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의 품에 내가 다시 안기는 날이 온다면 나는 분명 그를 붙들어 매어 내 곁에 두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뜨거워진 피를 지니게 된 계집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앞으로 나는 내내 사내들을 끌어들여야 할 것이었다. 단 한 사람, 내 지아비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하여. 나는 몸이 뜨거운 계집이기에, 마음 뺏긴 사내를 인연의 오라로 단단히 내 것으로 묶고 싶어 하는 욕심 많은 계집이기에, 이 부나비 같은 몸뚱이와 넋 또한 내 사내, 내 지아비의 것에 꽁꽁 묶어두고 싶은, 저 저잣거리 흔하디흔한 계집이기에.
추정한묘(秋庭閑猫), 그 이름 그대로 내 인생은 가을 정원처럼 그지없이 쓸쓸한 것이 되었다. 나른한 고양이가 뒤뜰에 누워 가을 햇살을 받듯 눈앞을 지나가는 모든 것을 무심히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사내든, 고통이든, 기쁨이든 내게 모든 것은 눈앞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하리라. 삭막하고 황폐한 가을 정원의 그림자, 한눈에 내 넋을 앗아간 그 사내를 뺀 내 인생이란 간신히 그것이었다.

만취해 들어온 서방님이 국화 향 짙은 가을 달빛 아래 또 그렇게 허위허위 춤을 추고 있구나. 그러나 지금의 춤은 기쁨에 겨웠던 그날의 춤이 아니다. 그렇구나. 저자거리에서 상처를 입은 것이 어찌 나 혼자뿐이랴?
창호지에 어리는 그의 춤추는 그림자만 보고도 내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내 고통에는 그토록 힘들여 흐르던 눈물이 그의 고통 앞에는 이리도 쉽게 흐르는구나. 어디를 다친 것일까? 짐작은 가고도 남는다. 저 사내의 허허한 자유로움을 이 땅 어느 사내가 감당한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이 문을 열어젖히고 그를 부르고 싶다. 그리하여 내 뜨거운 몸으로 그의 다친 마음을 지져주고, 나의 흐르는 눈물로 그의 쓰라린 환부를 씻어주고 싶다.
검은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는구나. 서방님이 문고리를 잡고, 내 이름을 부르는구나. 오래도록 내가 밀쳐낸 저 사람, 내 손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내밀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 손을 간신히 거둔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건너가 자라고 내뱉는다. 검은 그림자는 한참을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구나.
나의 애정은 땅에 뿌리 내린 암컷의 애정이기에. 당신처럼 허위허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잔뿌리 하나 내리지 않는 가비야운 애정이 못 되기에 차라리 이렇게 이를 악물어야 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이 타오르는 몸과 삭아 내리는 마음으로 저 문을 열고 당신을 붙든다면 나는 다시는 당신을 놓지 못할 터이니. 그리하여 당신이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시들어 목숨이 끊어진다 하여도 이미 아귀가 된 내 정념은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터이니.
허공의 사내와 흙의 아낙이 만났으니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슬픔. 나도 당신과 같을 수 있다면, 나도 당신처럼 허위허위 저 허공에서 매인 것 없이 춤추는 계집이었다면.
힘없이 돌아선 서방님이 멀어져 간다. 아니, 문득 멈춰 선 것은 저 처연한 달을 바라보기 위해서인가?
서방님의 어깨가 다시 움찔거리는구나. 서방님 속의 슬픔과 고통이 동백꽃 지듯 춤으로 뚝뚝 떨어지겠지. 서방님의 그림자 팔이 달을 향해 흔들거리고, 서방님의 그림자 다리가 국화 옆에서 건들거린다. 헛헛하고 괴로운 춤사위가 가을 뜨락에서 펼쳐지는구나. 달이 이울도록 서방님의 춤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지금 당신은 어느 세상으로 가 있는 것인지?

마침내 달이 저물어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서서히 묻혀 사라진다. 이제 서방님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 어둠 속에서 낮고 슬픈 서방님의 노래 곡조가 저미듯이 흘러들어온다.

서라벌 달 밝은 밤에
저잣거리 헤매는 이 몸
비웃음의 돌팔매에 비틀거리네
안해를 빼앗기고도
겁에 질려 도망친 사내라고
간도 쓸개도 없는 사내라고
사내라고 생긴 것들은 모조리
나를 향해 침을 뱉네
돌아가 안기고 싶은 안해마저
차갑게 나를 내치니
나는 이제 무엇을 하랴.
오직 춤추고 노래할 밖에.
                                       
서방님의 노랫소리가 한 뜸 한 뜸 바늘로 심장에 글자를 새기듯 명치끝을 파고든다. 숨을 쉬기가 괴롭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저 품에 안기고만 싶다.
그러나 문고리를 잡아당기던 뜨거운 손이 차가운 쇠의 감촉에 섬뜩해 물러선다. 어쩔 것인가. 이렇게 저 사내를 다시 붙잡은들 어쩔 것인가. 그리하면 내 정념의 밧줄은 더욱 더 칭칭 그의 넋을 묶으려고 할 것인즉.
내 몸을 인두로 지지고 싶다. 내 몸에 깃든 그 뜨거운 정념과 풀어줄 줄 모르고 묶으려고만 드는 집착의 오라와 땅에 딱 붙어 허공으로 날아오를 줄 모르는 이 굵은 뿌리로 뻗은 나의 육신을. 이 모든 것을 인두로 지지고, 칼로 잘라내고, 저 사내처럼 날아오르고만 싶다.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이 몸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어둠 속에 누운 채 나는 처용의 모습을 그려본다. 무수히 손으로 어루만졌던 그 얼굴, 넓디넓은 이마와 무성한 눈썹을, 능금처럼 붉은 얼굴과 사기처럼 하얀 이를, 심목고비(深目高鼻), 깊은 눈과 높은 코를, 그리고 늘 춤출 듯이 구부러진 어깨를, 나를 품어주던 단목(檀木)처럼 옹골진 너른 가슴과 온몸을 덮은 검은 터럭들까지.
내 몸이 다시금 뜨겁게 달아오른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마저 뜨거워진다. 아무래도 내 몸을 흐르는 피는 물로 된 것이 아닌가 보다. 그의 태를 묻은 땅에서는 불이 붙는 기름이 치솟아 오른다고 하였다. 내 피는 그런 기름으로 이루어졌나 보다. 이 고통의 복판에서도 이렇듯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천형이라 해야 하는지.
달려 나가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싶건만 나는 이불자락만을 쥐어뜯으며 그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다. 내일은 이 이부자리 속에 또 다른 수컷이 끌려들어 와야만 하리라.

어느새 달이 이울어 창호지 밖은 컴컴하다. 밤새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서방님의 기척도 사라졌다. 방으로 들었는지? 아니면 또 어느 밤거리를 휘청휘청 헤매고 있는지?
이리 될 줄 알았더라면 그 어느 날 바람처럼 춤추는 서방님을 보지 말아야 했을 것을, 검은 괭이의 그림으로 서방님의 마음을 호리는 짓 따위는 벌이지 말아야 했을 것을.


                                        5                     

안개가 가을 뜨락을 덮고 있소. 조하주(朝霞紬) 비단을 보는듯하오. 아침안개가 낀 듯이, 물에 비친 구름 그림자처럼 아록아록 아름다운 그것, 이녁은 내게 조하주 같은 여인이었지. 알몸으로 품에 안고 그 가장 깊은 곳까지 몸을 맞대어도 언제나 신비로웠던 사람.
이녁의 방 앞에서 가만히 멈추어 보오. 자작자작 밥물 잣듯 고요히 퍼지는 이녁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소. 이제라도 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이녁을 단 한번이라도 품에 안고 싶소. 아니, 그저 그 고운 이마와 뺨에 얼굴이나 한번 부빌 수 있어도 좋겠소. 아니, 아니, 그도 욕심일 것이오. 오직 이녁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라도 내 눈에 담아 갈 수 있다면.
새벽잠 없는 이녁이 오늘은 어인 일인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하오. 잘 된 일이오. 이녁의 모습을 다시 본다면 내 어찌 저 길 위로 발을 뗄 수 있으리오?
추정한묘, 나의 사랑, 나의 여인, 나의 안해. 잠든 이녁을 두고 나는 이제 떠나려하오. 이 땅의 첫 인연이었던 개운포 앞바다로 갈 것이오. 그곳에는 이미 나를 기다리는 배 한 척이 와 있다오. 또한 대문 앞에는 아까부터 마부가 조용히 말을 매놓고 기다리고 있소. 꼬박 하루를 달려야 내일 아침 해가 돋기 전에 그 배를 탈 수 있을 것이오.

내 땅의 사람들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라고 불렀소. 황금이 넘치는 땅이기도 하였지만 물이 맑고, 공기가 신선하며, 토지가 기름지고, 모든 것이 충족하여 한번 이 나라에 오면 되돌아가는 것을 잊게 되는 눈부신 땅이라고 하였소. 그 아름다운 나라에 발을 딛고도 나는 이곳에서 긴 날을 머무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오. 이녁과 맺어지지 아니하였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이 땅을 떠났을 것이오. 내게는 황금보다는 오히려 푸른빛의 보석처럼 여겨지는 이 땅, 이녁 덕분이라오. 이녁은 서늘한 푸른빛 보석 같은 여인이었소. 이 새벽의 하늘빛처럼.
잠시 꿈을 꾸었던 것 같소. 이녁과 이 땅에 머무른 채 자손을 낳고, 이녁의 고운 얼굴에 잔주름이 일렁이고, 칠흑 같은 머리에 백설이 내리는 것을 보는 꿈.
그 길이 내 핏줄을 말라붙게 하고, 숨구멍을 막는 일이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그 꿈에 사로잡혀 있었소. 이녁을 떠난 내 삶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토록이나 이녁에게서 풀려나려고 하였던 것이라오. 이녁의 곁에 더 머무르기 위하여 이녁에게서 풀려나야만 하는 어긋남, 그것이 나라는 인간의 서글픔이오. 이녁을 안고 그 끝 간 데 없는 환락의 극치 속에서도 나는 후드득, 눈물을 떨구곤 하였소. 이녁이야 그것을 땀방울로 알았겠지. 왜 나는 이런 넋을 지녔는가, 이토록 고운 여인과 죽을 때까지 의지하며 한 무덤에 묻힐 수는 없는가, 그런 회한에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곤 하였다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나를 패대기치고, 이녁마저 나를 내치니, 비로소 나는 정신이 든 듯 내 속을 들여다본다오. 이 길만이 길인지는 모르겠소. 그러나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만은 잘 안다오. 더 이상 머무른다면 나는 살아있을 수 없을 것이오.
생각하면 이녁이 이렇듯 그 마음에 서늘한 주렴을 내리고 나를 피해주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소.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이녁 곁을 떠날 수 있었겠소? 이녁 또한 식은 정으로 이 이별을 조금이라도 덜 힘들어 할 터이니.

꿈이었다면 참으로 황홀한 꿈이었소. 언제고 다시 꾸고 싶은 꿈. 나는 잊지 못할 것이오. 이녁과 함께 보낸 모든 찰나까지도.
이제 남은 내 삶은 스산한 바람처럼 정처 없이 떠다니는 것뿐이겠지. 개운포 앞바다의 작은 돛단배를 타고 나는 또 어디로 실려 갈는지. 어디에 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어떤 여인을 품에 안든, 이녁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의 푸른 못으로 푸른 보석처럼 빛날 것이오.
말이 우는구료. 이제 떠나야겠소.
                                                                  

                                       6

말이 우는가? 그를 싣고 갈 말이?
푸르르, 몸을 떨며 뒷발질 하는 소리도 들리는구나. 그 소리에 놀란 듯 내 몸속, 작은 생명도 발길질을 해댄다.
창호지 바깥으로 아침 안개가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안개 속에 들리는 희미한 말울음 소리와 말방울 소리.
언젠가 그가 얘기했듯 먼 훗날 이 땅에는 저 사내의 넋의 조각들을 품은 바람의 자손들이 퍼져나갈 것이다.
다음 생의 어느 구석에선 우리 두 사람도 두 줄기 바람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는지.
잘 가시옵소서.
나는 이만 눈을 붙이고 못다 꾼 꿈을 마저 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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