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컵에 사람 마음이 찡할 때가 있었다
지하철 움푹 팬 의자에 누가 물 한 컵을 흘리고 갔다
지하철 흔들릴 때 물 한 컵도 흔들리고 있었다
물 한 컵 때문에 아무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몇 정거를 지나서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이
물 한 컵 옆에 앉아 휴지를 꺼내 물을 훔쳤다
할머니는 누군가를 위해 의자를 닦고 닦았다
한 정거를 더 지나 그 자리엔
젊은 여자가 앉아 젖먹이한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물 한 컵으로 사람 마음 적실 수 있다는 것!
아주 오랜 된 젊은 날,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 때
강원도 깊고 높은 두메산골에서 야학을 하다
아이들 눈가의 눈물을 바라보며 내려오던 날
안개 속 교사(校舍) 뒤편 툇마루 함석집 할머니가
우물물 한 바가지를 권했지만 목부터 메었다
지금 나는 그 깊고 높은 곳에서 훌쩍 내려와
이 낮고 얕은 곳에서 미적미적 사는 것 아닌지?
눈 뜨고 창밖을 내다보아도 안개 속 때문일까
물 한 바가지 혹은 지하철 물 한 컵 때문일까
물 한 컵 속에서 나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내일을 여는 작가
